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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주술적 리더쉽

주술적 리더쉽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닮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주사가 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그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비슷해진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모방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게 틀리더라도 혼자만 그런게 아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낀다. 종교적 리더쉽의 위험성 역시 모방에 있다. 신적 권위를 흉내내는 것이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 왕이 된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려 하나님이 금지했던 백성을 계수하는 일을 하였다.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신적인 권위를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모세를 들 수 있을텐데, 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런 하나님의 뜻도 있던게 아닐까? 절대적인 권위와 순종을 설파하는 이들은 그 매력적인 지위를 가장 가까이서 간접적으로 누리는 자들이다. 오직 신에게만 한정되야 하는 그 권위가 불완전한 사람의 속성에게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도 사단이 유혹했던 방법중 하나는 바로 이 권력과 명예에 관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사람에게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기때문이리라. 


주술적인 리더쉽은 어떤 도전과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로움에 따라 신적인 권한으로 강화되고 공고해진다. 어떤 비판과 비난에도 자유로운 신의 대리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 권력을 자기화시키기 쉽다. 그렇게 모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위에 선 권위가 공동체에 의해 숭배되어지기 시작하면 사교집단처럼 되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주술적인 권한은 그냥 단순한 1인의 리더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그런 신적인 권한을 부여한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자극과 리더가 제공하는 것에만 반응을 하며 좀비화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역시 신의 대리인이 보인다면 경배하기 편하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그들은 보이는 신이 필요했기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술적인 리더쉽을 경배하는 군중은 자기 자아 실종현상을 겪게 된다. 몰아가 되어버린 개인들로 이뤄진 공동체는 결국 좀비와 다를바 없어지는 것이다. 공동체가 발전하려면 소신있는 의견과 생각들이 자유롭게 발현되야 한다. 그러려면 집단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주술적인 리더는 그런 소신은 권위에 대한 위험한 도전이 될 수 있기에 허용치를 않는다.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는 그 방향성에 있어서 언제나 옳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낭떠러지 향할 때 소신을 갖고 경계하며 대안을 제시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리더쉽 아래서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확신은 대리인을 위해 모두 소진해버린 상태로, 보이는 신적인 권위가 더 이상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못할 때 결국 남는건 파멸뿐이다. 그저 흩어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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