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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37 유언장



후배가 뜬금없이 종이 한장을 내민다. 자기 유언장이라고 한다. 유언장이라기 보다는 자기 채권목록이다. 누구에게 얼마를 투자 명목으로 주었는데, 그 이자에 원금 얼마해서 돌려받을 금액이 적혀있다. 자기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채무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꼭 기억하고 체크했다가 자기 아내애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후배는 주식을 비롯해 이런 저런 투자로 큰 손해를 봤다. 돈 씀씀이가 컸던 후배는 투자하는 단위가 컸고, 아내 몰래 투자해서손해본 금액이 자기 아파트 금액이었다. 착하디 착한 후배의 아내라도 견딜 수 없는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같이 사는 남편이 속이고서 벌인 일에 대한 배신감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후배는 늘 그 문제로 속상하고 힘들어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의리를찾는 후배는 그 와중에도 빚때문에 힘들어하는 지인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여기에서 꿔 저기로 빌려주고 저기에서 빌려 또 다른 곳에 빌려 주었다. 거절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속상하고 이렇게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투덜거리는 후배였다. 그래서 혹시 자기가 도저히 이러고 못살겠다 싶어서 무슨 일이라도 벌이면 나더러 꼭 갖고 있다가 자기 아내에게 전해주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일축을 해버렸지만,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고 쓰는 거 좋아하는 후배가 이것저것 묶여서 늘 빚에 시달려야 하는게 안타까웠다. 자기 유언이라면서 남기는 쪽지 한 장이 빚에 관한 목록이라는게 한편으로는서글프기도 했다. 그 종이 하나가 후배의 인생을 설명하는 마지막 문서라는게 말이 되는가. 인생을 사기치는 타짜가 뒤에 서있는것 같았다. 물론, 그게 그의 전부일리는 없겠지만 아뭏튼 그가 반드시 잊지 않고 남겨야 하는 중요한 메모가 결국 돈이었다. 얼마나 후회스럽고 통탄해할까.

 


죽는 순간 가장 큰 후회는 무얼까. 다시 산다면, 실컷 실수하고 실패하고 살고 싶다. 실컷 가보고 싶은 곳도 달려가보고, 하고 싶은 것도 실컷 해보며 살고 싶다. 탈탈 털고 굳이 적을 메모 하나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싶다. 크립톤 행성에 사는 슈퍼맨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고 살아가는걸까. 고작이 조그만 공간에서 반복적인 습관과 틀에 박힌 사고만 하다 죽으려고 그 숱한 정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냈단 말인가.신이 부여한 자유를 이렇게 철저히 기만당하고 살다 죽으면, 나라도 소리치고 싶을 것같다.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줄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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