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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36 군중속에 섞이는 연습만 지독스럽게 한다


늦은 퇴근길, 지하철 개찰구앞에 한 여인이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을 줍고 있다여러 장의 메모지들이었다. 마구 흩어져 있어서 하나씩 줍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같았다. 줍는걸 도와줘야 하나? 타이밍이 중요한데, 지나치면 돌아서는 것도 뻘쭘한 일인데 생각이 흘러가는 것만큼 발걸음도 성큼 성큼 내닫으면서 시선만 뒤에 남았다.  나를 비롯해 누구도 그 여자분을 도와서 메모지를 주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중년의 남자가 뒤에서 오는데 메모지들쪽으로 가길래 주워 주는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메모지 위를 지나가 버렸다. 짜증스러웠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거라고 그냥 도와주면 되지 그걸 그냥 지나쳤나. 무리중에 한 사람으로 섞여버리면 양심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점점 습관이 되어간다. 에이 못났다 못났어.

 


늦은 저녁 집으로 가는길은 고등학생들이 종종 아침에 분주하게 등교로 다니는 길이다. 저녁 무렵 퇴근길 길바닥에는 온갖 음란하고 민망한 여성들의 누드가 그려진 카드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정도가 너무 심해 주워서 쓰레기 통에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게 은근히 민망스럽다. 한 두장도 아니고 포르노같은 카드들을 줍는다는게 체신 머리 없어 보이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버젓이 그걸 보면서 줍는다는게 모양이 빠졌다. 그냥 군중속에 섞여 버렸다. 시선은 역시 뒤에 남겨둔채. 무리에 섞여 버리면 양심은 자유롭다. 그래도 주워서 버릴걸 그랬나, 그러기에는 너무 선정적인 사진들이라 모른 척하는게 나은지도 모르겠다. 성큼 성큼 지나쳐버렸다. 이놈의 버르장머리

 

오늘도 군중속에 섞이는 연습만 지독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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