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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22 로보캅

로보캅

 

남자는 가방의 촉감이 좋았다. 생일 선물이라며 아내가 백화점에서 사준 가방이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는 손에 드는 서류가방이 늘 아쉬웠다. 전부터 들고 다니던 가방은 색도 바랗고 헤져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깔금하고 세련된 서류가방에 멋진 수트는 신사들의 로망이 아니던가. 하지만, 특별히 비싼 돈을 들여 가방을 구입해본 적이 없는 남자는 선뜻 거금을 들여 가방을 구입하는게 망설여졌다. 물론, 언뜻봐도 명품가방이 폼도 나고 멋지기는 한데 가격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이들면서 사람이 좀 깔끔할 필요가 있겠다 싶은 남자는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좋은 가방을 사달라고 했다. 털털한게 고맙기도하지만 늘 털털한 남편이 답답했던 아내는 잘 생각했다며 백화점에서 가방들을 둘러봤고 메이커 손가방 하나를 구입했다. 요즘 애들말로 간지나는 가방이다. 아내는 잘 했다며 너무 털털하게 하고 다니면 사람이 값싸 보인다며 자기 가방산 것처럼 맘에 들어했다. 자기한테 돈쓰는게 인색한 남편이 어쩌다 제대로 된 물건이라도 살라치면 아내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가방을 구매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남자는 다른 사람의 가방에 자꾸 눈길이 갔다. 미장원을 다녀오면 다른 사람 머리만 보인다더니, 남자는 다른 사람들 가방에만 눈길이 들어왔다. 손가방을 든 사람도 있지만, 요즘은 백팩을 메는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고등학교때나 백팩을 메지 요즘 사람들은 정장을 입고도 백팩을 멘다는게 영 낯설었다. 남자들은 딱히 악세사리라고 하는게 없으니까, 시계나 가방같은걸 잘 코디하면 세련돼 보인다고 아내가 격려해준다. “그치? 확실히 좋은 물건은 다르긴 다르네”  남자는 모처럼 비싸게 주고산 가방이 흡족하다 그럼, 나이들수록 사람이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 돼. 그리고 좋은 가방이 비싸다고 해도 그게 튼튼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본전 뽑는거야.비싼데는 다 이유가 있거든 아내도 괜히 흥에 겨워 남자에게 맞장구를 친다.

 

출근하는 전철은  조금만 늦어지면 만원이다. 합정역은 여러 방향의 전철들이 손님들을 내리고 태우는 곳이라 여간 붐비는게 아니다. 조금만 늦어도 하루를 파김치로 시작하게 만든다. 출근준비가 좀 늦어진 남자는 부지런히 전철역으로 향했고 기어코 만원전철을 타게 생겼다. 남자가 내려야할 곳은 합정역에서 한참을 더 가야 하기에 좋은 자리를 확보해야만 덜 힘들다. 전철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시위대처럼 밀려들었다. 사람들속에 밀려들어가면서도 남자는 가방 생각이 났다.  새로 샀는데, 가방이 구겨지는건 아닌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사람들로 꽉 채워진 전철은 정말 불쾌하고 힘든 곳이다더구나 요즘은 백팩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전철에서 백팩때문에 불쾌할 때가 많다.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사람이 자리를 잡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통에 그 사람의 백팩이 남자의 얼굴을 위협적으로 스치며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짜증이났다. 마치 앞에 방패를 들고 선 병사처럼 백팩을 멘 사람이 밀어붙이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여간 불쾌한게 아니다. 백팩에게 괜히 인상이라도 써봤자 백팩이 알리도 없다. 스파르타에 나오는 용사도 아니고 백팩은 정말 강력해서 밀쳐지지도 않는다. 상대는 어차피 자기 몸과 몸으로 부딪히는게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는 판이니 여간 불리한 싸움이 아니다. 심술궂게 백팩을 옆으로 밀어버리려고 해도이게 쉽지 않은게 가방을 몸에 바짝 멘 사람은 전혀 끄덕하지 않는다. 몸에 달라붙은 백팩은 몸과 합일이 되어서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거대한 덩치를 가진 미식축구선수가 되기 때문이다. 백팩을 움직이려면 사람도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여간해서는 돌아가지가 않는다. 몸끼리 부딪히면 상대에게 의사표현이라도 할 텐데 뒤에 멘 백팩이니 얼굴도 볼 수 없고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의 공간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뿐이었다.천하의 밉상도 이런 밉상이 있을까. 그런다고 세게 밀어버리기에도 뭐한게, 그렇게 되면 상대의 몸자체를 밀어버리는 셈이 되니 영문도 모르게 밀쳐진 상대는 당황스럽고 기분나쁜 상황이 되어버린다. 중간에 적당하게 메세지를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백팩을 한사람만 맨 것도 아니다. 옆에서 백팩이 심술궂게 밀고, 뒤에서 백팩이 왜 미냐고 다시 밀고. 그들이 몸을 돌리거나 이동할때마다 거대한 미식축구선수가 블로킹을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 옆에 있던 아주머니 한분이 짜증스런 신음을 내면서 누군가의 백팩을 옆으로 밀쳤다. 밀치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백팩의 주인공을 노려본다. 잠시 자리를 벗어난 백팩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아주머니를 공격했고아주머니는 다시 예의 그 짜증스런 표정과 신음으로 가방을 밀어냈다. 백팩 주인들이야 으레여기 저기 밀리는 전철안에서 그런가보다라고 심드렁할 뿐이니 아주머니는 여간 약이 오르는게 아니었다. 남자는괜히 약올라 백팩의 주인을 그냥 확 밀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미는척 하다가 가방을 잡고 확 잡아당겨서 바닥에 내팽개치면 얼마나 속시원할까 싶었다. 하지만, 백팩은 흡사 전투경찰들의 방패같았다. 대학때 데모하면서 맞닦뜨렸던 전투경찰들의 방패는 무적이었다. 밀어붙이려 해도 밀쳐지지 않고 오히려 대오를 정비한채 밀고 들어올라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철기군이었다. 남자는 백팩을 메는 사람들의 심리야말로 이기심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등에다 메고 나몰라라 휘둘러 버리면 그만이고, 자신은 자유롭게 제 할일만 하면 됐다.  두 다리에 적당한 균형과 힘만주고 버티기만 하면 세상에 이만큼 편리한게 없다. 부대끼는 전철안에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인가. 남자는 이 전장터에 갑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온 장수같았다.  자신이 들고 있는 서류가방은 너무나 걸리적 거렸다. 가방을 들어야 하기에 한 손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나머지 한 손만이 손잡이도 잡고, 스마트폰도 체크해야 했고, 공격해 들어오는 적군과도 외로이 싸워야 했다. 너무나 불리하고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반면에 백팩을 메고서 거침없이 남자를 공격해오는 좌우사람들은 태연하게 스마트폰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게임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는, 빌어먹을 백팩까지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철기병과의 싸움, 그건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아침에 이렇게 출근을 하고 나면 하루 에너지의 반은 써버린것만 같으니 남자는 일찍 서두르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났다.

 

자신이 내일 역에 다가오자 남자는 최후의 싸움을 해야했다. 사람을 보면서 길을 만드는건 어렵지 않다. 내린다는 무언의 신호를주면 사람들이 적당히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격이 있으니 상황파악을 하는데,  백팩은 무례하고 거만해서 내리는 남자의 신호에도 무반응이다. 남자는 바쁘게 내린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백팩들을 벽에다 확 밀어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세게 눌러서 기어코 백팩의 주인을 주저 앉혀버리고 싶었다. 백팩의  온갖 만행을 전혀 모르는 백팩의 주인은 지 할일만 몰두할 뿐이었다. 남자는 예전에 봤던 폴링다운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무더운 여름 교통체증은 지옥같고, 직장에서는 해고됐고, 아내와  딸로부터는 멀어지게 됐고 차안에서 파리는 윙윙대는날, 마침내 그 짜증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주인공이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걷는다. 그리고는 총을 뽑아들고는 온갖 짜증나는 것들을 향해 분노하고 폭발해버리는 영화다. 남자는 그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더글라스가 이해됐다. 만일 주인공이 이 전장터 한복판에 백팩들로부터 이렇게 공격을 당한다면 총기를 난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정도 무례한 백팩은 상상도 못했을테니, ‘폴링다운 2’는 이걸 가지고 만들면 대박이지 싶었다.

 

마침내 자신의 목적지역에서 간신히 내린 남자는 백미터를 달려온 선수같았다. 울컥 짜증이 올라온 남자는 생각할수록 백팩주인들의 뻔뻔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등뒤에 백팩을 둘러멘 주인들이야 나몰라라 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오는내내 씨름한 다른 사람은 무슨 죄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빌어먹을 남자가 투덜 투덜, 걸어가면서 중얼거린다. 어차피 듣는 사람들도 없어 하나마나 한 얘기지만, 한마디 욕이라도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듯 싶었다. 새로 산 가방은 그렇게 조심에 조심을 했건만 모양 사납게 구겨지기까지 했다. 남자는 비로소 왜 모두가 백팩을 메고 다니는지를 알았다. 호모하빌리스들은 전쟁터처럼 여러 사람과 부딪히는 일상에서 자신을 지킬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최고로 추구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던거다. 그래서 정장을 입은 상태에서도 굳이 백팩을 메고 다니는거였다.

 


그날 저녁 퇴근길, 남자는 가방가게에 들렸다. 돈이라는게 한번 쓰기 어렵지, 쓰기 시작하면 은근히 관성이라는게 있다. 산 김에 하나 더 사는것도 나쁘지 않다. 가방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야 여러개를 돌려서 가지고 다니면 더 오래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고동색의 윤기가 금속처럼 흐르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메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남자는 문득, 거울앞에 로보캅이 서있다는걸 알았다. 흡족해진 남자는 당장이라도 전철로 뛰어들고 싶어 근질거린채 거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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