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일 에세이

5회 공구함

공구함

 

공구함은 남자들의 로망이다. 어릴적 의자가 고장나면 아버지는 공구함을 들고와서 의자도 고치고 밥상도 고쳤다.  어린 자식의 눈에 아버지는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만물상, 맥가이버다. 무언가 부숴지거나 고장난 것을 고칠때 가족에게 받는 환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때 인정받는 뿌듯함. 고쳐내고 만들어내고,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을때  심겨진 DNA 있는게 분명하다. 아버지의 공구함은 언제나 근사해 보였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못도 담아놓고 망치도 담아놓고 드라이버도 담아놓고 공구함은 창조의 재료들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때문일까, 우리 몸안에 DNA때문일까, 아뭏든 그럴듯한 공구함 하나를 마련했다. 아버지만큼은 아닌것같지만 곧잘 전문가 흉내를 내면서 뿌듯함이 생겼다. 그런데, 간혹 급하게 사용해할 공구용품이 없을때가 있다. 정리를 못해서 공구용품들을 아무곳에나 두거나 흘려버리는 것이다. 심할때는 왠만한 공구용품이 남아있지 않기도 하다. 마땅한 크기의 나사못이 없고, 분명히 놓아두었던 십자 드라이버도 없다. 어디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아내도 모르고 가족들 누구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어떨때는 크기별로 사용하려고 구입했던 작은 드라이버통이 없다. 찾고 찾고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짜증스러움은 흡사 강박증 수준이다. 가족들의 환호는 덜렁이 아빠에 대한 웃음이되고 사용한 물건을 언제나 제자리에 놓지 못하는 습관은 아내의 잔소리감이 된다. 스스로도 여간 짜증스러운게 아니다.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표현하지 않으면 안타까운 느낌만 남아서 표현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자기 언어를 꺼내서 재창조 하고 망가진 것들을 수선하고 부활시키고 싶은 것들도 많다. 그런데 느낌은 한 보따리여도 단어가 몇 개 없다는 것에 당혹스럽다. 연장을 꺼내듯 내 안에서 고작 찾아지는 것이 투박한 장도리같은 단어 몇개뿐이다. 그동안 텅빈 연장통을 안고 살았던거다. 대체 공구통에 왜 이것밖에 없을까. 짜증스러움이 올라오고 절망감마저 찾아온다. 고작 이정도 공구들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에 기가막히다. 여태 살아온 날들이 그정도 단어면 되는건지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무리 감명깊은 책도, 이야깃거리 많을듯한 영화도 샛노란 개나리도, 언어가 없다는 것은 내게 아무런 감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저자에게도 화가 나고 배우들한테도 화가나고 봄꽃들에게도 화가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언어에는 그토록 도도하더니 정작 자기는 별로 가지고 있는 언어들이 없다는 배신감에 부르르 몸이 떨린다.


나만의 언어를 갖고 살지 못했으니 나는 죽었던게 아닌가, 나는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천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7화 정글  (0) 2017.04.02
6회 달리기  (0) 2017.04.01
4회 결정장애  (0) 2017.03.28
3회 직장이 아닌 직업을 요구하는 시대  (0) 2017.03.27
2회 한국축구 중국에 지던 날  (0) 2017.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