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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나의 방송일기 1

#방송일기 1


올해 들어 방송에서 가장 큰 변화는 영상작업이다. 영상을 통해 또 다른 미디어로도 복음을 동시에 전하는 일이다. 영상을 하다보니 라디오를 오랫동안 진행하는 습관이 눈에 들어왔다. 산만했다. 오랫동안 또다른 진행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언가 다른걸 하느라 분주하다. 신기한건 상대방 말을 안듣는 듯 한데, 두꺼비 파리 낚아채듯 넙죽 넙죽 잘도 치고 들어온다. 물론, 라디오라는 오디오 매체의 속성상 굳이 눈을 보지 않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건 아니다. 며칠 그런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일상에서 습관을 곰곰이 돌아보니 일상에서도 그런듯하다. 말하는 사람의 눈을 오랫동안 보는게 아니라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있다. 무엇인가를 만지던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던지, 다른 곳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또 다른 곳으로 부리나케 시선을 옮긴다든지.  


방송 시스템이 1인 시스템이다 보니 진행을 하면서 콘솔도 만져야 하고 음악도 찾아야 하고 다음 코너도 챙겨야 한다. 피디도 하고 아나운서도 하고 엔지니어도 한다. 우린 그걸 아나듀오라고 한다. 문자도 봐야하고 마이크도 체크하며 원고도 봐야한다. 한가지만 집중할 수가 없다. 낭패당하기 십상이다. 여러 가지를 살피고 준비해야 한다. 모든게 물흐르듯 매끄럽게 흘러가려면 여러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어야 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영상까지 카메라를 잡고 스위칭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종종 방송이 끝나고 나면 미처 하지못한 질문이 생각나 아쉬움이 남는다. 청취자가 궁금해할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들여다볼 책임이 진행자에게 있는데, 질문은 피상적이고 비슷 비슷한 종교적인 언어들만 가득 채워진것같아서 낯뜨거울때가 많다. 복음방송이라는게 ‘은혜’로 감동이 있기도 하지만, ‘은혜’라는 보통명사안에 매몰되는 숱한 고유명사들과 그에 맞는 질문들이 묻혀버린다. 비슷 비슷한 단어들과 뭉뚱거려진 언어들, 비슷한 종교적인 용어들만 이어서 붙이고 반복을 하다보면 방송은 또 그렇게 지나간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때는 내가 부흥사가 된 것인양 방송으로 설교를 신나게 하던 때도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내 것이 아닌 언어들이 껍데기만 걸친채 나만의 그럴듯한 언어로 바뀌어 쉴새없이 토해진다. 공감은 사라지고 가르치고 설명하려든다. 삶의 경이로운 골짜기를 지나가는 어느 백발 노인의 수염을 붙잡고 설교도 하고, 기나긴 사막의 한복판 끝도없는 그 길을 지나는 순례자같은 아주머니에게는 바울흉내도 내본다. 


라디오는 포즈가 있어서는 안된다. 목소리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채워져야만 한다. 그래서 언제나 이것저것을 준비하면서도 내가 해야할 말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간혹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다 “또 또 자기 할 얘기만 생각하고 있지”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하고 빈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이것저것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단어와 문장을 준비하다보니 어떤때는 나 스스로가 값싼 복음의 난장을 만들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 다음이 비지 않도록 나의 언어는 그득 그득 생성되고 준비된다. 상대의 이야기는 때로 바람에 휘날려버리기도 하고 개밥의 도토리마냥 천대받으며 이리저리 뒹굴다 나의 언어에 소멸되어버린다. 


말이라는게 우물같아서 물이 충분히 고여있지 않으면 벽을 긁게 된다. 가끔은 해야하는 언어가 마른 가슴을 벅벅 긁는 것같다. 은혜는 말을 마구 쏟아내는데서 생기는게 아니라, 묵묵히 담아내는데서 풍성해지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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