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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할아버지 4가지 얼굴

# 할아버지 4가지 얼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다. 기억은 필요한 것만 가지니까. 어쩜 더 많은걸 가졌는지 모르지만, 내게 허락된게 그렇다. 아쉽게도 손주로서 살갑게 대우받은 기억이 없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개구쟁이 오빠는 억세고 통제가 어려웠나보다. 가정 형편도 어려웠고 해서, 부모님은 나주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나를 잠시 맡겼다. 1년은 안됐던 것같다. 그때 기억나는 시골생활은 적막감이 전부다. 매일 밤마다 시커먼 산을 보며 엄마 찾아 울었으니 조용한 적막감이 아이에겐 괴물과도 같았으리라. 


그 시골에서 같이 지냈던 할아버지는 그닥 살갑지 않았다. 들은 이야기지만, 밥을 먹다가 할아버지한테 밥숟가락으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기억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떠올리면 몸서리쳐지게 할아버지가 밉다고 하신다. 경우에 밝았던 할아버지는 아마도 개구쟁이 꼬맹이의 밥상머리 무언가가 맘에 들지 않으셨나보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할아버지가 용서가 지금도 종종 이야기하신다. 하지만,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칭찬하실 때도 있다. 경우가 아주 밝은 분이라는 것이다. 억지 춘향으로 자기 고집만 부리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대한 자기 기준이 명확히 있어서 경우에 합당한걸 아주 중요시 여기셨다. 할아버지를 아시는 모든 분들의 공통된 이야기이긴 하다.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화를 내셨고, 녹색괴물 헐크가 따로 없었다. 화를 내는 경우도 잦았다. 이러저러 여자저차 해서 이런거니까 이러면 안되는거지... 일단 경우가 틀려지면 돌이키기가 어렵다. 형제사이어도 의를 끊는건 당연하다. 경우라는게 한번 잣대를 들이대면 생각이 꼬투리에 꼬투리를 잡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과거까지 들먹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나’로 자기생각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배려나 용서가 없다. 기억나는 할아버지 얼굴이 단편적인건 그래서인가보다. 마음좋은 넉넉한 여느 시골할아버지 얼굴, 포청천같은 화가나 미치겠는 얼굴, 익살스럽게 귀엽게 웃는 희미한 얼굴. 할아버지 얼굴은 네가지 표정이 전부다. 진지하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생각에서 빠져나온 얼굴을 본적이 없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순하게 공감해주면 들어주는 얼굴을 본적이 없다. 공감하면 사람 얼굴이 얼마나 좋은데.


나이가 들면서 아내와 말다툼을 할때면 나를 다스리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어쩜 할아버지랑 똑같냐” - 아버지? 아버지 얘기는 기니까 빼자. 암튼 아버지도 할아버지 아들이긴 하니까 - 이 생각을 하는거다. 그럼 좀 당황스러워진다. 갑자기 경우를 따지던 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떨때는 똑 맞기도 하고 어떨때는 비슷하기도 하다. 정신이 퍼뜩난다. ‘그럼 안되지’ 할아버지때문에 부모님들이 얼마나 몸서치쳤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닮은건가? 내가 닮아가는건가? 퍼뜩 퍼뜩 걱정스럽기도 하고 ...


할아버지의 얼굴 네가지중 마지막 얼굴은 아주 짧은 시간 본 얼굴이다. 그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할머니도 먼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는 우리집에서 돌봐야 했다. 대학4학년인 나는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남자인 할아버지 대소변을 보는게 마뜩치 않아서 내가 대소변을 보고 목욕을 시켜드렸다. 방안에 병자로 누운채 힘없는 육신에 갇히 할아버지의 그 절망감과 비참함이 그리고 회한이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배는 고파 먹어야 하고 기저귀에 대소변을 흔건히 봐도 오로지 손주의 처치만을 기다려야 하는 그 무력감에 아기가 되버렸다. 할아버지 병수발을 참 대견하다고 얘기들 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기쁨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살갑게 대한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는 선배는 할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고, 힘들어하던 나는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점점 병세가 심해져서 음식도 못먹고 눈빛이 무척 흐려지기 시작하던 때 할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저 해야하는 어떤 일을 꾹 참고한 것외에는 없으니까. 친척들도 그다지 찾지 않던 할아버지는 흐릿한 눈빛으로 간신히 초점을 모아서 들으셨다. 그런 예수님을 할아버지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시라고 했고, 이미 말할 기력조차 없던 할아버지는 눈동자만 힘없이 떨구셨다. 다시 여쭤봤고, 눈을 드신 할아버지가 흐릿한 눈빛으로쳐다보기만 하셨다. 제 말에 동의 하시고 그렇게 영접하시겠다면 ‘아멘’이라고 대답해보시라고 했지만, 아무 기력이 없으신 할아버지는 듣기만 하셨다. 다음날도 기저귀를 갈고 미음을 몇숟갈 드신 할아버지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어제보다는 더 경청하는 듯 보였다. 나는 ‘제 이야기에 동의하시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할아버지’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제서야 할아버지는 성냥개비 끝에 남은 희미한 불꽃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이셨다. 다시 물어봤고,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도가 끝난후 할아버지는 힘없이 누우셨다.


다음날 아침을 드리려고 하니 할아버지는 드시지 못하고 그냥 앉혀달라고 하셨다. 기력이 거의 없는 상태인 할아버지는 오늘 내일했고 그제서야 친척들이 와 있었다. 오전이 거의 지나고 조금 이른 점심을 드리려고 들어가보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앉아계셨다. 진지드시라고 말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으셔서 급히 코밑에 손을 대어보니 숨이 없으셨다. 돌아가시기 이틀전 순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 얼굴, 아주 짧게 기억하는 할아버지 네 번째 얼굴이다.

#천일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