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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좀비사회



#좀비사회

좀비물을 좋아한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모른다. 언제인가 우연히 봤던 ‘새벽의 저주’를 보고 힘들었는데, ‘나는 전설이다’를 보면서 매료됐던 듯 싶다. 

좀비들은 특성이 있다. 오로지 자극에만 반응을 한다. 소리에 민감하고 사람냄새 (고기냄새)에 미친다. 평소에는 시체와 같은데, 자극이 주어지면 앞뒤볼 것없이 돌진한다.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어서 스스로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다. 어떤 좀비들은 햇빛을 피하기도 하고 어떤 좀비는 햇빛과는 상관없지만... 그리고 좀비는 살아있는 그 사람도 감염시켜 똑같은 좀비로 만든다. 당연히 좀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집단이 된 좀비의 오싹함은 ‘월드 워 z’에서 좀비들이 이스라엘 담벼락을 미친 듯이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좀비영화의 단골장면은 때로 달려드는 좀비무리들이 아닌가. 하긴, 이미 시체가 된 좀비들이 뛰면 관절이 부러지고, 내장이 다 흩날려야 하니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뭐 영화적 상상이니까. 


좀비물을 보면 좀비는 비급 상업영화에 괜찮은 소재겠구나 싶다. 대리만족이랄까, 누구나 미운 사람 화나는 대상이 있을텐데 그렇다고 사람을 향해서 그 미운 감정을 무지막지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않겠는가. 적당히 대리물이 될 대상만 있다면, 이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면 마음껏 그 폭력성을 ‘배설’해버릴 수 있지않을까. ‘배설’이야말로 인간이 가지는 고급스런 문화놀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비급 호러소재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가면서 영화가 비급을 넘어 메이저로 나온듯하다. 극한 공포속에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고, 결국 사람이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뭐 그런거 있지 않은가. 


사고는 없이 오로지 자극에만 반응하는 좀비는 그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일찌라도 통제가되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과 사고능력, 사유하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에만 광적으로 반응할뿐이다. 그리고 자신만 좀비가 되는게 아니다, 좀비는 누군가를 물어서 그 역시 자기와 똑같은 좀비로 만든다. 탐욕스런 개인은 공동체안에서 자신만 노예가 되는게 아니라 자기 옆에 있는 동료를, 자기 옆에 있는 지인을 자신과 똑같은 탐욕스런 노예,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 어떠한 합리적인 판단과 사고는 필요치 않다. 오로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들만 취합하고 자신의 욕망을 더욱 팽창시킨다. 심지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할찌라도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따라 공격한다. 그래서 좀비물에서 많은 주인공들은 자신이 물린 것을 알면 좀비가 되기 전에 죽여달라고 하지 않던가. 


개인은 사라지고 오로지 집단사고만 존재하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사라지고 오로지 집단만 존재하는 사회에서 망상에 사로잡힌 개인들은 좀비와 다를바가 없다. 미친 듯이 우르르로 몰려다니는 좀비, 오로지 집단사고만 존재하는 좀비들이 우리와 다른건 외모뿐이 아닐까. 오히려 우리는 그럴듯한 스토리와 망상을 동원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속이기까지 한다. 한번 죽은 좀비처럼 탐욕스런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이미 죽어버린 우리의 사고는 공동체에 속한 이상 어떤 반론도 없고 의심도 없이 오로지 그 무리에 동화되어 물고 뜯고 싶은 좀비가 될뿐이다. 물론 그중에는 좀비가 되어서도 사랑하는 아빠를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자살을 하는 좀비물도 있다. 일단 좀비가 되면 통제가 되지 않아 이야기의 서정성이 좀비되기전으로 맞춰져있었는데 말이다. 

암튼, 인류역사라는게 시체가 살아난 좀비만 없었을뿐이지 좀비같은 집단이 낳은 비극이 얼마나 많았던가.  


갈라지는 홍해를 바라보며 어안이벙벙해 눈물흘리며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후 고기를 못먹는다며 모세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차라리 노예로 살면 고기라도 좀 먹을텐데 광야에서 다윗이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했다고 모두가 길길이 날뛴다. 이제껏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을 곰곰이 생각해볼만한 사고는 없다. 피만 흘리지 않았을뿐이지 모세 눈에는 그들이 좀비같이 보이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선동은 옆사람을 물고, 또 그 사람이 옆사람을 물고 좀비바이러스처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비물에 나오는 괴물들마냥 모세를 물어뜯으려 야단법석일게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호산나 호산나’ 외쳤지만, 그들은 얼마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눈에 핏발을 세우지 않던가 좀비들마냥...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루터는 그 시대 집단사고에 금을 냈다. 좀비집단 사회에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세웠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이어받은 개신교는 그런 개혁을 모토로 삼아왔다. 믿음의 선각자들이 가르쳐준건 깨어있고, 사유하는 능력이다. 믿음의 깊이는 맹종이 아니다. 믿음은 사유의 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