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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영화, 말모이

누군 영화가 ‘국뽕’이라고도 하지만, 말을 지키려고 했던 선조들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다만, 조선말을 왜 지켜야 하는건지, 어떻게 그 조선말들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고증을 토대로 조금더 밀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상업영화에다가 역사적 고증에 관한 디테일까지 요구하는건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재에 비해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 진부해서 아쉽다. 왜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조선말을 막으려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상투적이고, 그 조선말을 지키려 하는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극히 제한적이라 아쉽다. 말모이의 실제 주인공 ‘이극로’선생의 삶을 조명했거나 중점을 두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정해진 시대물에 인물들이 끼워맞춰지다보니 윤계상이 왜 그렇게 조선말을 만들고 지키려했는지에 대한 동기도 헐겁고, 극중 편찬위원중 한 분의 죽음도 와 닿지가 않는다. 캐릭터가 밀도있게 살기에는 너무 틀에 박혔다. 그래도 우리시대 정신을 지키려했던 분들의 이야기, 우리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럭저럭 볼만했다.




말이 정신이다. 맞는 말이다. 의미는 말로 결정이 되고, 우리는 그 말에 의해 종속된다. 무한한 에너지는 누군가의 이해를 위해 축소되어 담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떤 말들로 자신의 우주를 담아내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우주는 제각각이다. 커피잔으로 물을 담아내면 물은 커피잔모양으로 커피잔 만큼이다. 바가지에 담긴 물은 그만큼이고, 접시로 담아낸 물도 그만큼이다. 똥을 펐던 바가지로 담아낸 물은 그런 물이고, 음식물 쓰레기를 담던 통으로 담는 물도 그런 물이다. 말을 할 때 존재는 비로소 내 안에서 모양도 갖고 성질도 갖게 된다.


얼마전에 햇빛이 내리쬐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한겨울, 깨진 유리같은 햇빛에 함박눈이 반짝 반짝 베이며 나리는 동화같던 날. 그런데 그 풍경을 보고도 아무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덤덤했다. 분주한 일상에 오히려 황당할뿐이었다.
어느날 친구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달려간 한 선배분은 아무런 눈물이나 감정조차 생기지 않던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양화대교를 그냥 걸어서 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분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신선하고 놀랄만큼 경이로운 온갖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그저 벙어리일뿐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경이로운 세상에서 창조적인 상상의 언어로 즐거워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는게 아닌지. 강제로 히라카나를 외우던 순희처럼 우리의 언어는 강제적이고 통제됐다. 그런 면에서 에덴는 장소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그분을 닮은 우리의 언어들 그리고 그 위에 머무는 영혼도 우리는 잃어버렸다. 우리의 언어는 메마르고 기계적이고 반복될 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늘의 언어들,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것처럼 그 분의 형상을 따라 찾고 모아져야 하는 우리들의 말모이. 영혼은 언어를 따라 머문다.

#천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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