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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군중은 우상이다

군중은 사기꾼일 수 있다. 본질을 가리기 쉽다. 사실을 왜곡시키기도 쉽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도 군중의 소란스러움은 확신을 갖게 만들고 마땅히 품어야 하는 의심에도 믿음은 최면술사처럼 찾아온다. 모든 합리적인 고민은 드러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소심하게 눈치만 보다 제 풀에 스스로 꺽어버리고 만다. 군중과 어울리지 못하는 개인은 어딘가 소속되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주고, 소속감은 어떤 대가와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 치환된다. 그래서 군중의 이 위압적인 힘은 합리적이거나 신뢰할만하다기에 불안하다. 나의 의심은 옆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확신을 갖지만, 옆 사람 역시 누군가를 통해 확신받았을 뿐이다. 그 누군가는 나로부터 확신을 가졌을지 모를 일이다. 

군중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힘때문이다. 다수는 힘이 된다. 물리적인 힘이 필요할때 다수는 곧 힘이기 때문이다. 군중은 옳고 그름 역시 상대적으로 만들어버린다. 가치는 만들 수도 있다. 옳은가 아닌가에 관한 문제조차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어디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가치는 군중이 매길 수 있다. 힘에 대한 경향성은 사실이나 의미를 얼마든지 왜곡하기 쉽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정말 상대적인 것일까. 


  마가는 예수님 부활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두명의 제자들이 다른 모습을 한 예수님을 만나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그 두 제자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가복음 16장은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완악했다고 한다. 완악했다는 의미는 억세고 고집스럽고 사납다라는 뜻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불신은 더욱 자극이 됐고, 그 그릇된 확신은 누군가에게 또다른 자신감까지 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중에는 “제기럴,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준게 뭐야? 우리가 그토록 믿고 따른게 이꼴 볼라고 따른 거냐고?” 그중에는 사기당했다고 했을지도 모르고, 울화통이 터져서 얘기를 꺼낸 두 제자를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후에 자신의 모습을 처음 공개한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었다. 7년 귀신들렸던 여인 그리고 예수님이 치료해주셨던 여인 막달라 마리아라고 마가는 말한다. 예수님은 어쩐 일이신지 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주셨다고 했고, 당연히 마리아는 흥분했지만 모두가 믿은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를 만나셨을 때도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부활을 알리셨다.  


군중, 개인이 숨어버리거나 죽이기 좋은 덫이다. 여리고를 정탐하고 온 정탐꾼들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자신감이 되고 완악함이 되지 않았을까. “가나안은 우리랑 너무 다른데 ” “다른게 뭐야, 우리랑 비교가 안되고 풍요롭고 잘 살던데 ” “잘 살아서 그런가, 몸들이 얼마나 좋고 기골이 장대한지 기가 죽던데 ” “기가 죽는 정도가 아니라, 우린 그냥 딱 메뚜기 수준이지 뭐, 그냥 모가지를 똑 부러뜨리면 꺽어지는 메뚜기지”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저 빌어먹을 두 놈은 그런 곳이 좋다고 가자는거 아냐, 그냥 콱 메뚜기 마냥 죽어버리라는 거 아냐, 저 새끼들 무책임하게 선동해서 우리 다 죽이려는 거 아냐 ” “ 처음부터 잘난척 하는게 영 마음에 안들었는데, 저 새끼들 그냥 둬야 하는거야? ” 

군중은 바이러스가 퍼지기에 그만이다. 한 사람 건너 또 다른 한 사람 순식간에 군중 전체를 한꺼번에 감염시키기에는 군중만큼 좋은게 없다. 예수님 부활에 대해 완악하게 조롱하기에는 혼자보다 군중이 더 제격이었을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우리 모두는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군중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에 완악하게 여론몰이 하는 그 제자들, 무리일 수가 있다. 모여있는 무리나 규모가 주는 흥분은 군중들 속에 섞여 아론의 황소를 만드는데 열광하는 것이 가치라고 믿게 만든다. 군중에 속해야 한다는 소속감이 어떤 진지한 성찰조차 죽여버리니 군중은 마침내 신적인 위치까지도 도달하는 우상일 수 있다. 

규모와 사이즈에서 벗어나 비로소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지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때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진리를 보게 된다. 갖은 병자와 이적을 행하는 예수님께 열광하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때마다 예수님은 매번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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