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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회색분자

# 회색분자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시국관련 데모가 한창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사회참여 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진 건 아니었다. 대학생이라는, 데모라는 호기심과 허세로 휩쓸리던 친구들도 많던 시기였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동기중 한 여자아이가 내게 시국에 대한 의견을 건넸다. 정치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그녀의 질문들에 대해 이도 저도 아닌 식으로 말을 했다. 어느쪽이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창 이야기하던 그녀는 한심하고 답답했는지 “너 회색분자구나”라고 했다. 회색분자! 좀 당황스러웠다. 그 어감때문이었다.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 어정쩡한 중간지대에 서 있는 비겁자. 그런데 사실, 그녀의 말은 맞다. 분명히 나는 어떤 입장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자신없고 저것도 자신없었으니까.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안에 부활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부활은 실재이고 만약에 부활이 없다라고 하면 신앙은 존재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바울은 강변한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부활에 관해 이야기 하며, 우리의 소망이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한다. 부활, 지금이야 익숙한 개념이지만 당시에 부활이라는 용어가 지금처럼 익숙하지는 않았을터, 분명히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라고 하는게 믿기지 않는 교인들이 있던 모양이다. 하긴, 요즘 교회안에도 그런 교인들이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때 수련회를 가야하는데 돈이 없었다. 부모님은 교회 다니는걸 반대하셨기 때문에 몇만원 내야하는 수련회비를 주지 않으셨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회형은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같이 믿음으로 기도해보자고 했다. 알겠다고 했지만, 이미 내 계산으로는 나올 수 있는 구멍은 분명 없었다. 뻔한 계산이 나오는데 그걸 믿고 기도해야 말아야 하나 나는 자신이 없었다. 며칠도 안되서 나는 수련회비를 냈다. 형은 무척 기뻐했다. 역시 믿음으로 기도하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했다.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기도하니 친구에게 돈을 빌릴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그냥 빌리면 되는 일이었다. 돈을 빌렸다는 얘기에 형은 당황하더니 웃으면서 ‘그게 어떻게 하나님 응답이야’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게 부담스러웠던 것같다. 기다리다 안되면 수련회도 못가고 하나님 응답도 없고 모든게 무용지물이 되는게 아니던가. 스스로 해결하고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니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같았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다는 언약의 자식을 스스로 해결한 것처럼. 


신념은 부정될 때 충격이 크다. 자신이 가진 믿음이 깨질 때 아프다. 그래서 다치지 않게 깊이 깊이 꼭꼭 안전하게 숨겨두기 쉽다. 이성과 믿음은 애매한 경계선을 정해놓으면 된다. 괜히 발을 내딛었다가 막연한 믿음에 내상만 입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이땅에 계시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치료하셨다. 심지어 죽은 사람조차 살리셨다. 예수님의 소문은 장안에 화제였고, 병든 자들에게는 특히 기적의 소망이었다.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잡겠다고 필사적이었던 여인들은 그때마다 나음을 입었다. 하지만, 혈루병 앓던 여인들이 장안에 그들뿐이었을까. 장안에 소경이 바디매오 한 사람뿐이었을가. 하지만, 모두가 열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처럼, 모두가 소경 바디매오처럼 예수의 옷깃을 잡았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 나오려 했던 이들중에는 여기저기 밀쳐지고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게 힘들어 입맛만 다시다 돌아섰는지도 모른다. 시도조차 하지 않던 이들중에는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하면 세상에 소경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그렇다고하면 세상에 혈루병 앓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아마도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중 끝까지 놋뱀을 보지 않던 사람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놋뱀조각 하나 쳐다보면 나을꺼라니, 그렇다고하면 우리중에 아프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지만, 실낱같은 한가닥 믿음에 대한 상실이 두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막연하고 모호한 불확실성속에 남겨둔 소망. 그 소망만으로 살아도 충분한 안개같은 회색지대. 




예수가 없어도 예수는 이야기할 수 있다. 성령이 없어도 성령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은혜가 없어도 얼마든지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다. 부활이라는 그 직설적인 도전에 답을 하지 않아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겨자씨만한 믿음에 대한 환상에 굳이 반응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건 외면하거나 돌아가면 될 일이다. 내가 이해할 법한 개념, 내 논리로 치환하면 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선까지의 경계. 그 회색지대는 안전하다. 


믿음과 이성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적당한 타협은 두려움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게 될 것에 대한 회색분자가 갖는 두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