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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사회적 구원,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첫 설교

사회적 구원,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첫 설교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마귀가 시험했던 것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었다. 개인적인 필요였고, 개인적인 욕망들이었다. 하긴 인류의 조상은 그 개인적인 욕망에 속절없이 무너졌으니까. 

배고픈 자신을 위해서 기꺼이 빵을 만들어 보라 했고, 자신에게 절만 하면 권세와 명예를 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는 성전꼭대기로 데리고 가서는 뛰어 내리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장소 성전꼭대기, 그곳에서 다윗이 광야에서 했던 고백을 이뤄보라는 것이다.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고 자극한다. 물론, 예수님이 그렇게 못하실 분이 아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베드로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쳤을 때 그런 말을 하셨다. “너희는 내 아버지께 요청하기만 하면 열두군단도 넘는 천사들을 당장 보내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성전 그 꼭대기에서 떨어질 때 천사가 내려와 받쳐든다면 이보다 더 위압적이고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좋은 일이 또 있으랴? 하지만 이는 개인의 욕망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쫓으셨다. 

예수님을 만난 사탄의 노림수는 개인적인 욕망들이었다. 그런데 누가를 비롯한 제자들이 기록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더 확장한다면 사회적 구원에 관한 것들이었다 .


누가는 예수님이 서른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먼저 기록하는데, 그가 기록한 요한은 무서운 독설가이다. 자기에게 찾아오는 군중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그런다. 살벌하다. 그리 말한 이유가 그 뒤에 나온다. 회개를 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위선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고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래도 나는 교회는 나가니까’ 뭐 그정도일까. 요한은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한다고 비웃었다. 그에 끝내지 않고 도끼까지 들먹이며 열매를 맺지 못하니 도끼로 다 찍어버려서 불에 던져 재로 만들어버릴거라고 말한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할만한다. 요한의 분노는 열매때문이었다. 그렇게 흥분한 요한에게 누가 묻는다. 그럼 어쩌라는거냐고. 요한이 건넨 얘기는 옷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나눠주어야 하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굶주린 사람과 나누어 먹어야 하고, 세리의 경우에는 규정된 것 이상 더 세금을 거둬들이지 말아야 하고 군인들에게는 남을 위협하거나 폭력을 써서 돈을 뜯어내지 말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 한다. 이 메시지는 예수님의 이후 사역과 비슷한 말씀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비유하시던 예수님의 말씀. 너희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고 힐책하셨다. 요한은 찍어 불에 던지고, 예수님은 말려 죽이셨다. 나의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다 튼튼히 집을 짓는 사람이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반석위에 튼튼히 집을 짓는 사람,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신 것이 바로 뺨맞는 비유이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주라는 비유이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것이라고 하셨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숱하게 했던 외침, 공의와 맥을 같이 한다. 


종교는 자기 수련일 수 있고, 자신의 복을 위한 필요일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자기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의 필요에 민감할 수 있다. 나의 필요가 채워져야 하는 곳이다. 아마도 그런 개인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는 곳으로 사람들은 몰려드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필요라는게 굶주린 내게 마땅히 왜 빵이 필요한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일테고, 필요하다면 자기에게 권세와 명예가 주어져 그것을 통해 그 다음을 도모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권세와 명예도 당연히 개인의 우선순위가 될 수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자신의 논리로 능히 많은 사람들앞에 이적도 필요한게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개인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더 나아가 사회적인 구원에 관한 의미를 역설하신다. 열두명의 제자를 세우시고 처음 하신 강론중 대다수는 개인의 필요에 적용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셨다. 모두가 타인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셨다. 어쩌면 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초점은 어긋난채 평행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자들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 누가 우리중에 큰 자가 될 것인가 집요하게 예수님께 물었고, 서로 질시하고 때로 분노했다. 세배대의 두 아들의 어미는 자신의 자식들이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고, 그것을 알게된 제자들은 분노했다. 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고 거절을 하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저희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게 해서 그들을 태워버릴가요?”라고 하지 않던가. 무슨 어벤져스도 아니고. 마치 엘리야가 했던 것같이 쑥대밭을 만들어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분노를 드러낸다.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던 사탄의 방식과 흡사하지 아니한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정직하게 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는 열매, 그래서 아픈 자를 보살피고 어려운 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하나님처럼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이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첫 설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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