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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어느 장례식장

부산에서 몇 번 지하철을 타보기는 했다. 가족들과 놀러와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 놀러도 다녀봤고, 업무때무에도 몇 군데 돌아다녀도 봤다. 지하철이 있는 곳은 이용하기가 편하다. 왠만한 곳은 지하철을 이용해서 다닐 수가 있다. 지하철을 타면 15분정도 되는 거리에 장례식장이 있었다. 더듬더듬 가야하는 곳을 다시 숙지하고 지하철을 탔다. 

   사촌동생의 갑작스런 비보는 놀랍기도 했지만 은근 귀찮기도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왕복 교통비만 해도 10만원을 넘었고 조의금은 못해도 10만원은 내야하니 예상치 못한 지출이다. 경조사비야 용돈에서 나가지 않고 아내가 지원을 해주니 낫지만 그래도 생각지 못한 지출이다. 나이가 들면 경조사비가 거짓말 조금보태 우후죽순처럼 생긴다.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직원이 청첩장이라고 불쑥 우편으로 전해올 때는 언짢기까지 하다. 전화를 한 것도 아니고 평소 인사 한번 해온 것도 아닌데, 회사 동료라고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청첩장은 은근 짜증스러워 바로 휴지통에 버릴때도 있다. 

  사촌동생의 죽음을 전해준 어머니의 말투는 조심스럽고 아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응당 가야한다고 말을 하지만, 나이들고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상갓집을 함부로 가는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저승사자가 온 김에 나이든 자신도 데려간다고 생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저승사자가 잊고 있다가 상갓집에서 자신을 기억해낼까 싶어서 그러는건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나 아버지가 부산까지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긴 했다. 어머니가 눈치를 본건 고모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으로 아들이 가지 않으려나 싶어서다. 집안에 장손이라고 하는 아들이 결혼식을 할 때 삼촌과 고모들 대다수가 참석하지 않았다. 종교문제때문이었다. 상을 당한 둘째 고모역시 매몰차게 아버지 어머니를 괴롭히며 상처를 줬고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고모와 삼촌 다 합쳐서 9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2-3명만 참석을 했으니 결혼식 사진이 휑했고 아버지는 언제나 그 일에 치를 떨고 분해했다. 어머니 역시 괘씸하고 분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화해를 시도했었고 그럭저럭 마음도 무디어졌다. 늙어 힘이 빠지니 빳빳한 마음도 삭혀지고 아득 바득 신경을 곤두세우고도 싶지 않았다. 귀찮아지니 무디어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들의 정확한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옛날 얘기를 하노라면 아들은 서운함도 비췄고, 때로는 딱히 마음쓰지 않는 것처럼 반응했다. 장손인 아들이 대표로 참석을 하면 그보다 더 좋은 모양새가 없는데, 자칫 아들이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있고 상처가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 한켠에는 복수의 마음도 있었다. 장성한 아들의 듬직한 모습을 고모와 삼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기때문에 조상이 노해서 망할거라고 고모와 삼촌들은 이구동성으로 저주했다. 하지만 오히려 고모와 삼촌들의 자식들은 결혼생활이 순탄치가 않았다. 이혼한 아들도 있고, 아직까지 결혼을 못하고 데리고 사는 자식도 있어다. 하지만 남자는 어엿한 회사 중견간부로 듬직해 보이니 아들이 떡하니 나타나면 이 얼마나 통쾌한 복수가 될 것인가. 어머니에게는 그런 내심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 결혼식에 오지않은 고모와 삼촌들이다. 아들이 아무 속이 없다면 차라리 낫겠지만, 마음에 분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갈수는 없다. 고집센 아들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천하 누구라도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어머니의 조심스런 눈치는 아들이 꼭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어머니에 대해서 끔찍한 아들은 다른 이유로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대표로 다녀오겠다고 했다. 

   

자신보다 서너살은 어린 사촌동생은 어릴 때 만난 기억밖에 없다. 그땐 그나마 서로 갈등이 없으니 괜찮게 지냈다. 46세에 갑자기 죽은 사촌동생은 억척스러웠고 주변에 칭찬이 많았다. 홀어머니의 생활비도 드리고 동생의 사채빚까지 갚아나가며 저축도 해서 아파트까지 마련했다. 남편이 일찍 죽은 고모에게는 어금니같은 아들, 아니 또다른 남편이었다. 그 아들이 수영을 하고 나오면서 어지럽다고 하더니 쓰러졌고 그대로 응급실에 실려가 이틀 사경을 헤매이던 끝에 결국 뇌출혈로 사망한 것이다. 평소 아무 이상이 없었기에 사촌동생의 비보는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니는 특히 마음 아파했다. 사이좋던 시절에는 종종 연락도 하고 귀여워도 해주었고, 커서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조카가 대견했기 때문이다. 

   부산역에 내리니 밤하늘이 억수같은 비를 뿌렸다. 우산을 미리 준비했지만, 쏟아지는 비가 바람을 타고 옆으로 들이치니 바지가 금방 젖어왔다. 부산역은 기차와 전철이 연결되지 않고 분리되어 있다. 전철을 타려면 부산역을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지하철역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가야 했다. 이렇게 불편하게 만든 이유가 뭘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연결을 생각하며 남자는 부산이 영 꼴통스럽다고 생각했다. 환승을 하면 얼마나 간편하고 이용하기에 편한가, 왜 그 생각을 못한 것일까. 목적지 역에 내린 남자는 걸어서 병원 장례식장으로 가려고 했다. 인사차 가는 것외에는 크게 의미가 없으니 굳이 서둘러 택시를 타고 달려갈 일은 아니었다. 택시비를 지불해서 가나 걸어서 조금 늦게 가나 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더 늦게 갈수록 편했다. 헌데 걸어가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쏟아졌다. 하수구에 빠진 생쥐마냥 온 몸이 흠뻑 젖을 판이었다. 할 수없이 남자는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택시 기사는 연신 톤높은 부산사투리로 혼자 이야기하는 것인지 말을 건네는 것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냈고, 남자는 대꾸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맞을때는 영 언짢은 비가 차안에서 바라볼때는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장례식장 가는 길은 쉽지 않은 오르막에 있었다. 이런 오르막길을 비맞으며 걸었다면 정말 난감할 뻔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이미 와 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노인분이 천수를 다하고 죽는 상가야 호상이라고 여기저기 웃는 소리도 왁자지껄한데,  46세의 어금니같은 남자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안타깝고 충격이었다. 남자는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고모와 삼촌들 그리고 사촌동생들을 어찌 대해야하나 생각했었다. 안타까운 죽음이라 눈물을 흘려야 할지 아니면 그저 담담하게 들어가야 할지, 아들의 죽음에 울고불고 하는 고모는 또 어찌 대해야하는걸까. 평소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니 너무 슬프게 우는 것도 이상할 것같고 너무 덤덤하자니 몰인정해보일 것같았다. 또 오랫동안 교류가 없던 사람들끼리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나 거북스럽고 불편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이 의외로 조용했다. 고모와 지인들의 애통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보기좋게 빗나갔다. 어느정도 슬퍼할 준비가 됐던 남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확연하게 할아버지가된 고모부들 3명은 바깥에 모여 잡담을 나누다 남자를 보고 반가움반 어색함 반으로 맞아주었다. 식장안 여기저기 고모와 삼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들어가서 인사할때마다 어색한건 남자만이 아니었다. 피차 슬픈일이라서 할 수 없이 모인 것이니 첫 인사를 빼고는 뒷이야기가 없었다. 긴 세월 왕래가 없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단정한 중년으로 앞에 선 조카를 보는건 고모들로서 더 어색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영정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는 사촌동생을 위로하고 고모의 손도 잡았다. 핏발서린 혈기로 쌈닭같던 중년여인은 사라지고 순해보이기까지한 노인 한분만 앞에 있었다. 의외로 담담해 보이는 고모는 ‘내 이러고 산다’라는 말만 연신해댔다. 남자는 어머니에게 조의금으로 10만원을 하겠다고 했고, 어머니는 그정도면 됐다고 했다. 사촌동생이 죽었으니 폼나게 100만원이나 50만원 턱턱 내야하는게 아닐까, 여전히 남자는 고민을 했지만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10만원을 꺼냈다. 봉투에 돈을 넣으려는데 고모가 슬쩍 곁눈질하는걸 봤다. 순간 남자는 기분이 상했다.  그 찰나의 순간, 고모의 눈빛은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보다 돈을 받는 여느 장사치의 눈빛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상품은 아들의 죽음이고 값은 제각각이다. 얼마를 넣었을까, 얼마를 가져왔을까. 장례식이 끝나면 조의금은 얼마나 모일까. 돈이 있어야 장례도 치를 것이고 당장 생계도 신경이 쓰일테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남자는 고모의 그 눈빛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조의봉투를 내고서 남자는 친척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인사를 나눴다. 조그맣고 초췌한 할머니가 된 큰고모는 허리가 반은 접혀질 듯 인사했다. 남자는 영문을 몰랐지만,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그랬다는걸 알았고는 민망했다. 길에서 만나도 못알아보겠다며 큰 고모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고모들과 삼촌들은 끼리 끼리 모여 앉았다. 서로 패를 지어 나뉘어져 있었다. 큰고모와 한 패인 셋째 고모는 제일 사납게 어머니를 괴롭히던 시누이였다. 무섭도록 미신에 빠져사는 셋째 고모는 마주치기 가장 싫은 사람이었다. 반가운 듯 웃으며 손을 잡고 서로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남보다도 못한 할 말없는 어색함이었다

   저녁을 먹으라며 차려진 상에는 또다른 한 패인 부산 작은 아버지 내외가 자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건 남자에 대한 적대감이라기 보다 자기 영역을 지키는 초원의 육식동물들이었다. 남자 역시 적당한 거리감에 다가오지 않는게 고맙기까지 했다. 남자는 어머니가 그토록 부탁하던 일들을 마친 것이다. 이제 적당한 시간을 보며 일어서서 돌아가면 된다. 어머니가 바라던대로 여기저기에 나보라는 듯 눈도장을 찍어줬다. 이정도면 남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고모들이 어디가서 한번쯤은 이야기할 정도가 됐다. 게다가 어머니 바람대로 당당하게 먼저 안아도 주고 어깨를 감싸도 줬으니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아서 연신 싱글벙글 하지 않으셨을까.  

    저녁을 먹으며 작은 아버지는 조카가 죽을 당시 이야기와 자기 신세한탄에 여념이 없었다. 대장암 수술한 작은 아버지는 일을 못하고 집에만 있었는데, 이번에 조카가 쓰러질 때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보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들을수록 이야기는 작은 아버지의 무용담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면 우린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다. 친하다는건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계속 만나야 이야기꺼리가 생겨나고 반응도 하고 이어질게 아닌가. 친척이라 해도 꾸준히 정기적으로 만나야 오해도 풀리고 관계도 깊어지는 법이다. 그 매개가 되는게 서로의 끈이 되주는 아버지 어머니다. 부모가 계시니 명절이나 생신이나 찾아뵈야 하고 그러다보면 만나게 되고 근황도 얘기하고 오해도 쌓고 풀어간다. 싸워도 서로 모여야 풀어지고 정리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사문제가 생기면서 오해는 쌓여갔고, 소문은 다시 소문을 만들어가면서 미움은 움직일수 없는 태산이 됐다.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혈족이라는 것, 별 의미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 시간이 흐르면 공통의 이야기 거리가 사라지니 감정은 눈녹듯 사라질게 뻔한 일이다. 작은아버지는 조카가 쓰러져 자신이 병원으로 데려갔고 여기저기 병원을 알아봤고 결국 수술하다 포기하게 된 자초지종을 반복했다. 이야기는 조금 조금 달라질뿐 뒷이야기가 앞이야기가 되고, 중요한 대목은 다시 반복됐다. 그러다 자기 이야기에 지루해지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 이야기도 물론 반복됐다. 얼마나 할 이야기가 없으면 그럴까도 싶고, 자기 역시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다. 자기 사정을 알아야 공감하며 이야기할 것 아닌가. 적당한 추임새로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슬쩍 슬쩍 곁눈질로 시간을 봤다. 막차까지는 1시간 남았다. 이제 모든걸 서서히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왔다. 서로 공통된 누군가를 슬퍼하려고 왔지만 같이 슬퍼하고 위로하지 않았다. 누군가 슬퍼하면 누군가 자리를 피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패들이 모였다. 그러면서도 내일 발인까지 모두 있을 모양이다. 오늘 올라가냐고 작은 아버지가 묻길래 회사핑계를 댔다. 나만 간다고 하는듯했지만, 굳이 밤을 새고 싶지 않았다. 내일 하루 장례를 핑계로 휴가를 냈지만,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것이지 여기서 내일 발인을 보기 위해 밤을 새려는건 아니었다. 

    고모들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 장례식장을 나섰다. 작은어머니도 집에 들렀다 온다는 이유로 같이 가자고 했다. 본인도 그 장례식장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전철로 가는 중에 작은어머니는 상을 당한 고모걱정에 한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둘째고모와 작은 어머니는 한패다. 이전에는 죽은 조카가 100만원을 고모에게 줬는데, 이제 생활비가 나올 곳이 없다는 것이다. 막내아들은 아무 철이 없어서 지 앞가림 하는 것만도 신통할뿐이라고 했다. 고모도 그렇고 막내 아들도 그렇고 같이 사는건 전혀 생각지를 않았다. 막내는 사는게 팍팍해도 여전히 연예인마냥 멋부리고 다니느라고 정신못차린다며 답답해 했다. 작은 어머니는 유산문제를 물었다. 아들이 죽으면 생계가 막막한 어머니가 유산중 일부를 받을 수 있는게 아닌지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남자는 아는 변호사에게 물어보겠다고 했지만, 가당치 않은 말이었다. 아내가 있는데, 결혼한 아들의 유산에 어머니가 일부를 받는다는게 말이 되나. 작은 어머니는 기차를 탈 시간이 아직 충분하니 전철역에 내려서 조금만 더 이야기 하자고 했고, 이번에는 자기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아버지가 저러니 있는 돈 아껴서 약값해야하고 기약없는 미래이다 보니 누구를 어떻게 돕고 할 처지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어머니의 한탄을 이해못했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작은어머니는 고모가 어렵게 되면 형제들이 십시일반 돈을 내야하고 그건 못할 일이니 어떻게든 고모가 돈을 조금이나마 갖는 방안과 자신의 형편이 이리 어려우니 도울 수없다고 미리 방패막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는 듯 싶은데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들키지 말아야 한다. 겉과 다른 속마음을 알게되면 고역이다. 마음에는 괜히 편견이 생기고 상대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가증스럽고 얄밉기까지 하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속마음을 알고나면 비웃음까지 생겨난다. 적당히 알아보겠노라고 하고는 드디어 남자는 고대하던 기차에 올랐다. 장례식장이 너무 슬퍼지면 어쩌나, 침통한 분위기에 어떻게 젖어들어야 하나, 남자는 은근히 걱정됐었다. 적당히 연기하고 슬퍼하는건 어렵지 않지만, 그럴 경우 자칫 일어서지도 못하고 밤을 새야 하는 것까지 걱정됐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보던 남자는 문득, 사촌동생의 영정사진이 궁금했다. 영정사진속에 사촌동생이 웃었나, 미소짓고 있었나, 표정이 없었나,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내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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