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천일 에세이

날마다 100원을 줍다


전철을 타고 다면 뚜벅이가 된다. 걷고 걸어야 한다. 걸을 때는 늘 땅을 보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땅을 보며 걸으면 꾸부정하게 허리나 등이 굽는다고 어머니가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상체가 길어서 그런가 고개를 숙인채 땅을 보며 걷는 습관이 오래 됐다. 어느날 전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던중 문득, 길바닥에 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바닥에서 100원짜리는 줍지도 않지만, 5천원이나 그 흔한 1천원짜리도 본적이 없다. 5만원권도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니 땅바닥에서 돈이 자취를 감춘지 꽤 오래 됐다. 예전에 비해 현금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는 하다. 자동이체니 카드니 해서 긁기만 하면 지폐역할을 의심할 여지만 없다면 굳이 지폐를 들고 다닐 필요가 뭐 있겠는가. 종이 지폐가 사라질만하다. 


땅바닥에서 우연히 발견한 돈은 횡재다, 그것만큼 기분좋은게 있을까, 기분을 일순간에 바꿔주는 일이 또 있을까. 땅 파봐라 100원짜리 하나 나오나 봐라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잘 하면 땅바닥에서 몇곱의 돈을 캐낼 수 있었다. 특히나 주의력이 좋은 사람의 경우는 돈을 자주 주웠다. 그것도 귀신같이. 아버지가 그랬다. 예전부터 거리에서 돈을 잘 주우셨다. 똑같은 거리나 환경이어도 모두 똑같이 보는게 아니다. 누군가 보지 못한 것을 누군가는 본다. 누군가는 대충 지나버리는 것을 누군가는 눈여겨 본다. 평소 꼼꼼한 아버지는 예사로 사물을 보는 경우가 별로 없다보니, 길바닥에서 돈을 줍는 경우가 많으셨다. 1천원도 주우시고, 5천원도 주우시고 1만원도 주우시고 어릴 때 그게 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도깨비 방망이처럼 아버지는 저렇게 돈을 잘 주우실까, 어딘가에 돈이 널렸다는 얘기인데 나는 왜 그게 보이지 않나,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부러웠다. 그런데 나에게도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적이 있었다. 

도림초등학교 5학년 6학년때, 학교 운동장에서 늘 돈을 주웠었다. 운동장에서 오후에 놀다가 집에 가는데, 운동장에서 놀때마다 100원을 주웠었다. 그게 거의 한달은 됐으리라. 이스라엘에게 내리던 그날 그날의 만나처럼 매일 100원이었다. 100원이상을 주운 적도 없고 50원만 주운 적도 없다. 오직 100원짜리 한 개만 주웠다. 신기하면서도 보통 신나는 경험이 아니었다.  오늘도 100원을 주우려나 하고 기대하고 놀면서 운동장을 그때 그때 살펴보면 꼭 100원이 있었다. 설마 설마 해도 매일 100원을 주웠다. 100원이면 과일맛 사탕, 그 고급진 사탕을 한봉지 살 수 있었다. 10원이면 쫀드기를 4개 사고, 여러 불량품을 사먹을 수 있고 당시에 선풍적인 오뎅바를 50원에 사먹을 수 있었으니 100원은 적잖이 뿌듯한 돈이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모두 동전이나 지폐를 들고 다니니, 동전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놀다가 동전을 흘렸던 것이리라. 누군가는 흘려버리고 없어진 100원 때문에 속상해서 운동장을 찾았거나 집에 와서 돈이 어디로 갔는가 열심히 뒤지던 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도깨비 방망이같은 당연하고 익숙해지는 횡재였다. 사실 도깨비 방망이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것을 뺏어다가 누군가에게 행운으로 건네지는게 도깨비 방망이다. 누군가는 도깨비 방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실의 아픔이니 도깨비 방망이는 철저하게 횡재한 놈이 이름지은 언어유희다. 그대로 그날의 군것질과 탐욕으로 사라져 버렸다. 신기하게 매일 줍던 돈은 그때 그때 써버리는 돈은 점점 무감각해졌다. 마치 저금통에 모아놓은 돈을 익숙하게 찾아서 쓰듯이, 덤덤하게 줍고 낄낄 거리며 그날의 군것질로 써버리면 그만이다. 언제부턴가 고맙거나 감사하거나 신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기대감에 주우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니 오히려 돈이 더 없으려나 찾는게 일이었다. 



 거저 주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감, 그건 신앙과도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 거저 받은 은혜, 아무 댓가없는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이익과 연결이 된다. 익숙하게 학습이 된다. 손해를 본 것에 대해서 또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이나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 역시 누군가가 거저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게 한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마치 마약과 같이 다음 거저 주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감에 금단 증상을 일으키지만, 그것에 대한 고마움이나 감사는 마모되간다. 그랬다. 운동장에서 100원을 매일 줍다보니 언제부턴가 당연한 기대를 가지고 100원을 줍게 되고, 탐욕을 채우고도 내일 다시 공짜로 100원을 주울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어느순간부터는 마땅히 주워야 하고 발견해야 하는 내 돈같기도 하다. 100원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아쉬움이 된다. 지것도 아니면서. 거저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무기력해지고 뻔뻔해지고 무책임해진다. 


익숙한 것에는 하나님이 없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권태로워진 의식안에 하나님이 거할 자리는 없다. 감사는 고사하고 자기가 생각한 부당한 억지를 가지고 더한 욕심과 갈증만이 생길뿐이다. 육신에게 주어지는 편안하고 당연한 호의는 결코 유익이 없다. 육신은 정신과 마음과 언제나 반대이다.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거나 그 몸의 노예가 되거나 둘중의 하나이다. 거저받아 익숙해지면 몸은 괴팍해지고 교만해지고 게을러진다. 그래서 익숙해지려는 것에서 벗어나거나 변화를 주어야 한다. 육신이 고단하고 불편해 한다면, 그것은 맞는 길이다. 


익숙한 것에는 하나님이 없다. 


'천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진 알몸의 여인  (0) 2019.01.15
내 심장을 보던 날  (0) 2018.12.15
한정거장  (0) 2018.12.05
개나리가 난 참 좋다  (0) 2018.04.06
주술적 리더쉽  (0) 2017.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