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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30 내 머릿속의 지우개

내 머릿속의 지우개

 

가난하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세들어 살던 집은 출판사 부장들이 주인인 집이었다. 삼성출판사와 동아출판사 부장들이 주인인 집이었다. 세들어 살던 집은 방을 하나 세를 놓은 것이어서 문을 열면 주인집 거실인 그런 집이었고 고등학교때 집은 2층집으로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출판사 부장이었던 주인아저씨 거실에는 근사한 책장이 있었고 그 책장에는 멋진 세계문학전집들이 빼곡했다. 읽는 것보다는 장식용으로 보기좋은 책들이었다. 당시 전집들은 고가여서 가난한 집에서는 사주기가 여간 곤란한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만 열면 보이는 그 책들은 알음 아름 동생과 들어가서 읽었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자기 자식들은 책을 하나도 읽지 않는다면서 너희들이라도 실컷 읽으라고 개방을 해주셨다. 그래서 동생과는 책장에 있던 각종 세계문학전집을 공짜로 실컷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거실에는 책장이 있고 책이 한가득이다. 이사할때마다 골치아픈게 책들인데, 물끄러미 그 책들을 바라보노라면 도무지 책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다시 책을 펴고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새롭다. 그동안 읽었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걸까. 기억에도 남지 않는 책을 읽는게 뭐가 유익한걸까. 열심히 좋은 구절을 메모하면서 꺼내보지 않아서 그런걸까. 기억에 남지도 않는 책을 읽어서 뭐하는걸까. 아내는 책을 다시 보지 않는다면 그냥 버리라고 한다. 아까워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 어차피 다시 읽어도 기억에 나지도 않을텐데 뭐하러 공간만 저렇게 차지하도록 내버려두냐고 핀잔이다. 책이 일일이 다 기억에 나지 않아도 내용들이 사람의 무의식에 축적도 일상적인 사고속에서 언어속에서 나오는게 아니겠느냐고, 그게 사람을 알게 모르게 만들어가는게 아니겠느냐고 대답을 하지만, 나 스스로가 궁색하다는 생각이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읽을때만 좋으려면, 차라리 운동을 열심히 하는게 낫지 않나.

 


분명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책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다. 나를 아냐고 나를 기억하냐고, 케케묵은 질문에 여직 답을 못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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