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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커피맛

#커피는 쓰다 

“너희 학교나 학원애들도 커피 마시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내리며 아이에게 물었다. “네” 요즘 아이들은 커피를 먹나보다. 내가 학교다닐때는 머리가 굳는다고 커피를 못먹게 했었다. 그래서 고3 학력고사가 끝나는날 처음 한 일이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금지된 것을 해도 된다는건 이제 성인이라는 의미였으니까. “너도 먹어봤냐?” “네, 학원 선생님이 수업때 졸릴 것같으면 커피를 사주세요, 냉장고에 싼타페도 어제 학원샘이 주신거에요” “아빠가 커피내릴려고 하는데, 커피 한잔 마실래? 이왕이면 따뜻하게 드립한걸 마시면 좋지?” “네” 아이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커피를 내리고 물을 좀 많이 타서 아이에게 건넸다. 커피를 마신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맛없냐?” “써요” “ㅋㅋ 커피를 쓴 맛으로 먹는거지” 냉장고에 싼타페 커피를 보니 ‘라떼’였다. 커피에다가 우유를 조금 타 줬다. “이러면 조금 부드러울거야” 다시 커피를 마신 아이의 표정이 여전했다. “그래도 쓰냐?” “네” “그럼 그냥 줘 내가 먹을게” “아니에요 그냥 마실게요” 


성경에서 인상깊은 대목이 있다. 예수님이 유다로 인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히시던 밤,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는데, 그때 한 청년이 벌거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붙잡혔다. 그러자 이 청년이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나 살려라’ 벌거벗은채로 도망을 가버렸다. 4복음서중 유일하게 기록된 이 청년의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가버린 상태에서 이 청년은 왜 따라간걸까? 평소에 귀가 따갑게 듣던 어머니 마리아와 바나바 외삼촌의 이야기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부리나케 알몸에 대충 홑이불이라도 걸치고 따라갔던 것일까? 마가가 자기 이야기를 무기명으로 기록한 것에는 부끄러웠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철저하게 버려져야만 했던 예수님을 표현하고자 함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런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이면에는 과거 자신의 연약함과 부끄러움도 있지 않았을까. ( 베드로도 닭만 보면 울컥 울컥하지 않았을까? ^^ ) 그 이후에 마가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한참후에 그의 행적은 사도행전에 나오니까. 인생의 아픈 경험을 해도 인생은 다시 실수의 연속이다. 마가는 외삼촌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며 갈라서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아프게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사도들중에 수장이 되어서도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먹다가 안디옥을 방문한 바울에게 크게 책망을 듣기도 한다. 그는 이미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기전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을 먹었던 환상을 보지 않았던가. 인생의 맛이 쓰다. 반복되는 실수와 습관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디 쓰기만 하다. 해서는 안될 말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는 여전한 자신의 습관이 한탄스럽고,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에 비참하기만 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의 음란함은 뱀처럼 고개를 쳐들고, 공평과 정의를 가장한 위선의 칼날에는 피가 흥건하다. 



홀짝 홀짝 아이가 커피 한잔을 다 마셨다. “커피를 먹는 이유가 인생이 단맛만 있는게 아니라서 그래. 인생살면 맘대로 안되는 일도 많고, 속상한 일도 많고, 해서 안되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후회도 되고 마음이 씁쓸해. 인생이 어떨 땐 쓰거든, 커피처럼. 그래서 그 맛을 잊지말자고 커피를 마시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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