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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 에세이

예수는 실패자인가

#예수는실패자인가


1990년 교회에서 중고등부 선생을 했다. 개척교회라고 하기에는 조금 크고 그렇다고 자립했다고 하기에는 넉넉치 않은, 아이들이 많은 교회였다. 영등포 구름다리를 지나서이니 그다지 넉넉하던 동네도 아니었고 나그네도 많던 교회였다. 중등부때부터 알고 지내다 고등부로 올라온 아이중에는 ‘경천’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말을 정말 안듣던 아이였다. 기도시간에 대표기도를 시키면 대답도 안하고 그냥 멀뚱 멀뚱 있던 아이였다. 심지어는 5분가까이를 끌다가 결국 교사가 기도를 한 적도 있었다. “안해요” 그게 대답의 전부였던 아이였다. 무엇을 하자고 해도 언제나 시큰둥하고 지시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 말수도 없고 퉁명스럽고,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무안케도 했다. 같이 있으면 분위기 다 깨는 그런 아이였다. 때로는 답답함을 넘어 한심보이기도 했던 아이였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도 아무 생각도 없는 아이였다. 주일에 봉사가 많아서 당시 수원에 살던 나는 영등포에 있는 교회에서 토요일밤에 잠을 잤다. 경천이는 꼭 토요일 저녁이면 교회 2층 어린이집에 왔다. 그리고 멀뚱하니 앉아있었고 내가 라면 먹을래 그러면 그냥 같이 라면을 먹기도 했고, 비디오를 빌려오면 같이 봤다. 그렇다고 살가운것도 아니었다. 경천이는 그러다가 나랑같이 잠을 자곤 했다. 어떻게든 경천이에게 좋은 이야기도 해주려고 하고, 같이 즐겁게 놀아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번번히 머쓱해지기 일쑤였다. 경천이한테 질리기도 했고, 좌절도 했다. 달라지는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때로는 교회에 없으면 다른 애들이 영향이라도 안받을텐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교사로서 나는 경천이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뻔뻔하게 라면 얻어먹고 귀찮게 같이 자는 그 아이를 보면 나의 무능력이 답답했다. 나는 실패자였다.

고3이 된 경천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어보였다. 본인도 두려웠던 것같다. 일단, 이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리며 살것만 같았다. 그대로 교회를 다시는 나오지 않고 사라질 것같았다. 걱정이 됐다. 당시 먼 지방에 대학이 새로 생기면서 경쟁도 낮고 들어가기 어렵지 않은 대학이 있었다. 그때는 경쟁률이 미달이면 들어갈 수 있으니까. 경천이에게 경호학과에 넣으라고 했다. 미달일 확률이 있는 학교였다. 집이 어려워 등록금이 걱정인데, 그것도 일단 들어가면 학교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 있고 정 안되면 휴학하고 군대라도 다녀올 수 있고 제대하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된다고 했다. 경천이는 그 해 그 대학에 합격을 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대출을 받아 1년을 다녔고 군대를 갔다. 그리고 나도 교회를 옮기며 우리는 연락이 끊어졌다.


예수님은 실패자일까. 그분은 제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공금에 손을 대던 도둑이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변해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조차 간수못하고 결국 그에게 배신을 당했다. 제자라고 따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조차 변화를 시키지 못하면서 누구를 변화시키고 누구를 가르친단말인가. 유다뿐만이 아니다. 예수님곁을 지켰던 제자들도 서로 높은 자리 얻으려고 시기하고 싸웠고, 예수님이 죽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뿔뿔히 흩어졌으며 다시 살아났다는 얘기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이 그정도라면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닌가. 결과를 보고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 사는 방식을 따라 인과관계로 평가를 해보면 예수님은 실패자가 맞다. 결국 자본주의라는게 결과를 내야 가치가 있는게 아닌가. 
하지만, 그분이 실패자가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에서 이루었고 그 뜻대로 살아냈다. 결과가 어떠하든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방식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공생에 가운데 하나도 말씀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은게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대로 예수님을 비웃었다. “저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지 보자. 저가 이스라엘은 구원하면서도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십자가의 비참한 결말을 마음껏 조롱했다


바울이 대표적으로 핍박을 받았던 도시 빌립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이 유명한 복음성가의 배경이 됐던 도시. 채찍질과 모진 매질, 핍박을 받으면서도 미련하게 복음을 전했던 도시가 빌립보였다. 그리고 그가 그 만신창이 몸으로 빌립보를 떠날 때 그가 전도한 사람은 단 1명이었다.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생각할 때 빌립보에서 바울은 독선적이고 미련하고 융통성없고 자기 생각에만 갇혀있던 고집쟁이가 맞다. 너무나 비효율적인 사역이 아니던가. 결국 얻은건 자주장수 여자 한 사람이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실패자인가. 나중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 때문에 실패자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결과를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 할 것인가. 교회가 세상의 자본주의적 방식을 들이대니 교회안에서도 복음에 관해 실패니 성공이니라는 이야기가 나오는게 아닌가. 복음이 노력한대로 결과가 나와야 성공이고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실패인가. 언제부터 교회가 그렇게 세상 자본주의 방식으로 접근이 됐던가. 그렇게 본다면 성경은 온통 실패자들 집합소가 아닌가. 예레미야처럼 미련한 루저가 또 어디있던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했으니 빌립은 성공한 것인가. 그토록 사울곁에 있었지만, 사울을 변화시키지 못했으니 사울에게 다윗은 실패자인가. 에콰도르 와오다니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변변히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바로 살해당했던 네이트세인트등 5명의 젊은이들은 미련한 실패자란 말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로 복음을 성공과 실패로 가늠하는 잣대야말로 신앙의 가치를 인본적 발상에 따라 주권을 하나님에게서 자신에게 가져오는 위험한 발상이 아니던가. 자신이 직접 제사를 주관했던 사울처럼,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가인처럼, 9시나 오후 5시에 온 자나 똑같이 대우하던 주인에 대해 분노하던 종들처럼...


서울에 올라와 모르던 번호로 전화가 왔다. 경천이었다. 내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근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경천이 소식은 친구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부부가 같이 태권도 사범으로 자리도 잘 잡고 집도 좋은 것 분양받아서 아이 둘과 잘 산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경천이는 아는 사람에게 늘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경이형이 그때 자기를 끌어주고 좋은 얘기 안 해줬으면 자기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교회에서 매주 토요일 라면도 끓여먹고 같이 자면서 좋은 얘기 해줘서 자기가 방황하지 않았던것같다고... 경천이는 전화로도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좌절하고 교회에 차라라 안나왔으면 하기도 했던 마음이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2018년 경천이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갔다. 경천이는 노랑머리의 한 청년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천이는 그 청년을 상담해주고 있었다. 반갑게 맞아준 경천이와 태권도장 이야기, 아이 이야기,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르고 들으면 전도사인줄알만큼 신실했다.



나는 실패자인가 성공자인가. 성공자인것같다. 경천이가 잘되서 성공했다고 생각지도 않고 안되서 실패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성공하는 방법은 그 아이와 같이 있어주는 것뿐이다. 그 자리에 있었기에 성공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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