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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좋더만

영화 '프리즈너스' 우리가 들고있는 돌멩이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



이 영화에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아이들을 유괴해 살해하는 악과 그 악에 의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피해자가 있다. 악인과 피해자는 명확하다. 이 명확한 구분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영화 중반을 지나며 죄인과 피해자의 경계가 뭉개진다. 모두가 죄인이며 죄인은 그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모두가 고통스러워할뿐이다. 우리가 정의하는 죄인은 무엇인가? 절대선과 절대악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것일까? 잠재적인 죄인임으로 우리는 고통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것인가.

선으로 포장되기 가장 좋은 전제로 종교가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종교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독실한 신앙인이다. 홀리부부도 그렇고 켈러도 그렇고 신부도 그렇고 모두가 신을 섬긴다, 일상은 평온했지만, 욥과같이 자신들에게 찾아온 고난앞에 무력하다. 삶의 도전과 문제앞에서 가해자와 마찬가지 죄인이다. 




미로: 

이 영화의 후반기에는 중요단서와 수수께기로 미로가 등장한다. 주요 용의자였던 알렉스가 아이들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켈러의 고문에 미로를 찾아야 아이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용의자 ‘밥테일러’는 아이들이 있는 지도를 그린다며 미로에 집착한다. 이 영화의 악의 뿌리였던 홀리부부의 남편은 미로 목걸이를 착용한다. 홀리부부는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아이가 죽어갈 때 그들은 신을 찾았고 아이가 죽었을 때 신을 저주한다. 신이 아이를 낫게하지 않고 답을 주지 않음에 분노하여 악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들 부부의 신과의 전쟁은 미로속이었다. 홀리의 남편이 신부에게 찾아와 자신들의 죄를 고해성사했다는 것은 미로속에서 답을 찾았다는걸 의미한다.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 자신들이 기대던 종교성은 진정한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피상적인 종교행위는 진정한 미로를 만나게 됐을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신을 섬긴다는 종교적 행위만으로 죄인의 삶이 자유로워 지는 것일까? 신분의 변화가 가면 너머 죄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일까. 미로에서 답을 얻지 못한다면 영원히 아이를 찾을 수 없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가 위대한 민족 해방자라고 여겼던 유다의 배신도 미로속이었고,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린다고 생각했으나 아우에 대한 질투로 눈이 멀어버린 가인 역시 미로속에서 살인자가 되었다. 



지하실: 

영화에는 지하실이나 폐쇄된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켈러가 알렉스를 납치해 고문하는 곳은 폐쇄된 흉가이고 알렉스는 그곳에서도 감금된 좁은 방안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 켈러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이다. 신부역시 마찬가지다. 신부임에도 홀리부부의 남편 이야기를 듣고 그를 지하 어두운 방안에 묶어두고 살해를 한다. 이 역시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 어두컴컴한 지하, 켈러 신부의 심연 깊숙한 죄성을 상징한다. 아이들이 감금된 곳이나 켈러가 홀리부인에게 포로가 되어 떨어진 곳도 마당 지하였다. 밥테일러의 방안에는 여러개의 큰 상자들이 나오는데 모두가 뱀들로 가득채워진채 자물쇠로 잠겨있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자신만이 열 수 있는 내밀한 곳에 악으로 대변되는 뱀들이 꿈틀거린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켈러나 신부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던 홀리부부의 남편이나 모두가 겉으로는 평범하고 선하게 보일뿐이지만, 우리 심연 깊숙한 곳에는 언제든 혀를 날름거리며 나오는 죄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이분화되어 있다. 내가 하지않을만한 특정한 것으로 죄를 분류하고 나는 반대진영에 포진하며 면죄부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 우리안에 교묘하게 숨겨진 위선이다. 신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는 면죄부. 죄는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고 우리는 심판자인 신의 짝퉁으로 이를 정죄한다. 마치 예수앞에 끌려온 창녀를 향해 돌멩이를 들던 유대인들처럼. 하지만, 이 영화가 우리에게 도발한다. 과연 죄에 대해 심판하며 구별할만큼 우리는 절대선인가. 마치 자물쇠를 잠근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 뱀이 우글거렸던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죄성이 내밀하게 잠재되어있지 않은가. 불완전한 존재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한낱 피조물일뿐이었다. 피조물이 선악을 알며 하나님의 영역을 알 수 없기에 아담과 하와의 불행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죄를 분별하고 심파하려는 본성.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한 최초의 짝퉁 심판자가 아니던가. 


종교로 상징되는 위선앞에 도발적인 질문들로 불편해지는 영화, 우리 사회 통념상 언제나 쉽게 우리가 들고 있는 돌멩이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 절대악과 절대선이라는 질문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 신을 섬긴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한걸음 더 들어가게 하는 영화. 

정말 추천할만한 수작 '스릴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