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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좋더만

[영화] 곡성, 미끼일가 구원일까.

1. 일단 이 영화에서 등장한 우리 모두의 확신을 의심으로 반전시킨 ‘일광'은 외지인과 한 통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광이 등장해서는 알 수없었지만, 감독은 친절하게도 일광이 옷을 갈아입을때 ‘훈도시’를 차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훈도시를 보여줌으로써 이전에 나왔던 괴물과 외지인이 모두 ‘훈도시’를 차고 있는 외래 악마를 불러내는 종교의 일원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힌트를 미리 보여줌으로 해서 후에 일광이 ‘살’을 쏘는 굿을 한다고할때 이 ‘굿’은 이미 외지인을 쏘기 위한 ‘살’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수 있다. 그 ‘살’은 아마도 현주를 죽이려던 살이 아니었을까. 현주를 쏘는 자신들의 어떤 의식이 아니었을까. ‘무명’을 쏘는 ‘살’이라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그때 ‘무명’은 ‘외지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기에 그 ‘살’에 대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같다. 후에 ‘무명’을 보고 피를 토하던 것을 봐서는 ‘일광’은 ‘무명’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같다. 현주를 쏘던 ‘살’굿은 아버지 ‘종구’에 의해 중단이 되고 굿판은 난장판으로 다 부숴지게 된다. 그리고 ‘일광’은 무심코 ‘무명’을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피와 함께 엄청난 양의 토를 하게 된다. ‘일광’을 확신하던 관객은 이제 다른 의심으로, ‘무명’으로 의심을 하게 된다.  아주 강력한 힘이 있음을 알게 된 일광이 도망을 가게 되는데, 도망가는 과정에서 새의 배설물이 유리창에 쏟아지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광’은 가던길을 멈추고 다시 곡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마른 하늘의 새의 배설물은 아마도 까마귀의 배설물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불길한 주술적 존재중 하나가 까마귀였으니까. 아마도 부활하려던 악마의 힘에 의한 메세지 였고, ‘일광’은 다시 길을 돌려 자신이 해야할 일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것같다.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완수하라는 악마의 메세지. 돌아가면서 ‘일광’은 ‘종구’에게 미끼를 던진다. ‘무명’ 그 여자가 바로 귀신이었고 그 여자가 모든 배후였다고 미끼를 던진다. ‘무명’을 향한 ‘종구’의 의심은 결국 ‘효진’을 지키려던 ‘무명’의 힘을 차단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효진을 찾아나선 ‘종구’는 그 미끼를 든채로 ‘무명’과 마주치게 되고 ‘무명’이 해주는 말과 딸을 살리려는 마음, 그리고 ‘일광’이 해주었던 말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닭이 세번 울면 모든게 끝이 나니까 기다리라는 ‘무명’의 말에 괴로워하던 ‘종구’는 결국 자신이 본 ‘효진’이의 머리핀과 술집여자의 옷을 보고서 ‘무명’의 말을 거절하고 ‘효진’에게 달려간다. 달콤한 미끼를 앞에 둔 물고기처럼 ‘일광’ 이 던진 달콤한 미끼앞에 ‘종구’는 닭이 두번울때까지 고민을 하게 되고 결국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결과는 비극이 된다. 베드로가 닭이 세번 울기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슬퍼 울었던 것처럼.  



2. 베드로가 닭이 3번 울기전에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다. 베드로의 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었고, 두려움이었다. 닭이 울기전 세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부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게되고, 자신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꿈을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다시 옛날 그 어부로 돌아가게 된다. 실패하게 된다. 닭이 세번 울었을때 슬퍼하며 울던 베드로와 ‘종구’를 매치시켰다. 그 의심은 누가 던지는 것이며 의심이라는 그 미끼를 물었을때 목숨같았던 예수님은 베드로안에서 먼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종구도 결국 ‘효진’에 의해 가족이 죽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3.  일광의 ‘훈도시’는 결국 ‘일광’이 등장할때 간장독에 빠져있던 ‘까마귀’가 누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술적 존재로 등장하던 ‘외지인’이 있던 곳에 기분 나쁘게 함께 있던 동물이 ‘까마귀’였다. 그 ‘까마귀’는 누가 갖다  놓은 것일까? 독버섯이 만연하던 마을에서 할머니는 ‘효진’에게 자꾸 몸에 좋은 것이라고 먹이는 장면이 나오다. 그리고 ‘효진’의 엄마가 죽을때 ‘샷’안에는 엄마외에는 없었다. 그 할머니는 효진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촛불’, ‘일광’이 피워놓은 촛불을 끄지 못하게 한다. ‘효진’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뿔달린 소의 머리도 이질감을 준다. 장모는 ‘사탄’을 숭배하는 주술적인 어떤 종교에 심취한 또다른 신도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을 것같다.  





4. 편집상에 교묘한 효과는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미끼, 게임과도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외지인’을 향해 날린다는 ‘살’굿에 ‘외지인’이 같이 대응을 하는 것처럼 교차된다. 마치 ‘일광’의 그 굿에 의해 ‘외지인’이 밀리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건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의심,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첫째, ‘일광’의 굿과 ‘외지인’의 굿이 비슷하다. 닭의 목을 쳐서 피를 내고 피범벅이 되는 ‘일광’의 굿이나 닭을 여러마리 매달아놓고 피를 흘려가며 어떤 의식을 하는 ‘외지인’이나 그방식이 흡사하다. 염소의 머리를 모셔놓고 있던 ‘외지인’의 방이나 ‘일광’이 마지막에 피를 내려던 동물도 염소였다. 결정적으로 ‘외지인’의 의식의 제단앞에는 ‘박춘배’라는 죽은이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외지인’은 ‘일광’과 일전을 벌이는 게 아니고 자기만의 의식, 부두교에서 죽은이를 불러내는 의식과 유사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박춘배’는 부두교의 의식처럼 ‘좀비’로 살아나게 된다. 그런데 이 박춘배를 당황스럽게 찾던 ‘외지인’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시도하려던 것은 아마도 진행되다 만 ‘좀비’가 아니라 조금더 완성된 ‘악마’를 불러내려던 의식이었던것같다. 아뭏튼, 두 장면이 겹쳐지고 있었지만, 한 통속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같이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5.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의 배경에는 두가지가 다뤄진다. 하나는 누구나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표피적으로 알아가는 사실 ‘독버섯’ 그 ‘독버섯’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정의에 의해 불안하고 두려울수밖에 없기에  스스로 정의를 내릴 무언가가 필요하다. 또하나는 신비한 영적인 세계. 그런데, 모든 주술에 걸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 몸에 피어나는 물집같은 것이라고 봤을때 ‘독버섯’으로 인한 최면은 ‘주술’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음을 설명해준다. 초자연적인 어떤 힘으로 인해 모든 사안에 대한 인과 관계가 명확하다 하여도 그 단초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현실적인 것들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외지인’을 보고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무명’도 그러고 ‘일광’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고 후에 ‘일광’은 ‘무명’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한다. 물건을 흥정하고, 아파하고, 돌멩이도 던지고 손을 잡고 심지어 ‘무명’은 ‘종구’가 꿈에서 봤던 그 ‘괴물’도 꿈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괴물’은 영화초반에 실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악마가 마지막에 ‘부제’를 보고 그의 종교를 조롱하듯이 하며 자신의 손바닥에 있는 못자국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경상의 ‘도마’를 차용한 것같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고서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서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보지 않고 믿을 수 없었던 중구는 자신의 소매를 붙잡는 ‘무명’의 손과 ‘무명’이 입고 있던 술집여자의 옷, 그리고 효진이의 핀을 보면서 결국, ‘무명’의 말을 믿지 못하고 효진에게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외지인’은 ‘부제’가 말하던 대로 ‘악마’가 되어버린다. 예수님이 동굴에서 부활하듯이 ‘외지인’도 동굴에서 악마로 부활을 한다. 아마도 그 부활을 위해서 마을 사람 전체가 인신공양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었던것같다.  




7. 산만하게 쓴 이야기인데, 영화를 보다보면 ‘중구’는 많은 선택앞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선택으로 인한 여러가지 상황들이  때로는 선임에도 의심으로 인해 부정할 수도 있고, 악임에도 선택해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어떤 모양이 되었든 우리가 갖게 되는 무의미한 결정은 없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로 인한 인과관계, 불안과 의심이라는 선택앞에서 잡게 되는 여러 선택들이 ‘미끼’일 수도 있고 ‘구원’일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오컬트’적인 장르를 택해서 말하고 있다. 




2시간30분이 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상에서 어떤 것들이 편집되었을까가 무척 궁금해서 감독판이 기다려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때로는 불친절할 정도로 연출상 생략되고 끊어버리는 장면들도 많은 것같고, 특히 ‘무명’과 ‘외지인’일당의 조우, 특히 외지인과의 조우가 너무 아껴진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선과 악의 선택사이에 놓인 불안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은 없지만. 사족이지만, ‘효진’이를 연기한 아역배우의 연기는 저렇게 하드코어한 배역을 아직 어린 아이가 과연 감당할수있을지, 더나아가서는 괜찮은 것인지 옳은것인지 싶을만큼 소름끼쳤다. ‘곡성’ 미끼일까 ‘구원’일까.. 우연이 없다.  




6.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외지인’을 보고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무명’도 그러고 ‘일광’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고 후에 ‘일광’은 ‘무명’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한다. 물건을 흥정하고, 아파하고, 돌멩이도 던지고 손을 잡고 심지어 ‘무명’은 ‘종구’가 꿈에서 봤던 그 ‘괴물’도 꿈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 ‘괴물’은 영화초반에 실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악마가 마지막에 ‘부제’를 보고 그의 종교를 조롱하듯이 하며 자신의 손바닥에 있는 못자국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경상의 ‘도마’를 차용한 것같다. 도마에게 예수님은 ‘보고서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서 믿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보지 않고 믿을 수 없었던 중구는 자신의 소매를 붙잡는 ‘무명’의 손과 ‘무명’이 입고 있던 술집여자의 옷, 그리고 효진이의 핀을 보면서 결국, ‘무명’의 말을 믿지 못하고 효진에게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외지인’은 ‘부제’가 말하던 대로 ‘악마’가 되어버린다. 예수님이 동굴에서 부활하듯이 ‘외지인’도 동굴에서 악마로 부활을 한다. 아마도 그 부활을 위해서 마을 사람 전체가 인신공양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었던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