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그것을 이르면 존재를 알 수 있게되는 함축적인 의미, 그런데 우린 무언가 떠올랐던 그것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답답하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그 대상을 전달할 수가 없고 설명할 수가 없다,손에 쥔 모래처럼 존재가 사라져버리려고 한다. 존재의 의미가 불투명해지게 된다. 지명해서 일일이 설명할 수없기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실존의 의미를 부여했을까?
주인공들은 서로가 바뀐 것을 알지만 그게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고 그 대상이 서로 다른 성이라는 것과 대략적인 정보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전혀 의미없이 바뀌어 있던 것같은 각자의 존재를 서서히 알아가게 되고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현실의 사건을 알게 된다. 한쪽을 구하기 위한 또다른 한쪽의 확신할 수없는 노력. 그렇게 만날 수 없을 것같은 시공간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면서 서로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의 이름을 새기고 알리려고 하지만 결국 서로를 놓쳐버리게 된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 버리면 그게 꿈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 꿈에서는 이름이없으니까. ‘오마에노 나마에와’ 꿈같지만 분명한 그 존재를 잊지않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꼭 기억해야하지만 결국 이름을 알수 없게 되어버린다. 실재했던 의미는 허공으로 흩어지고 꿈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 기억을 지워버리듯 사라져 버려야할 것이 소중한 기억이고 사랑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지만, 이름이 정말 중요한걸까? 이름이 아니어도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도 내 주변에 다가와 있는게 아니겠는가.
시간은 돌이키기힘든 헤어짐이 될 수 있지만, 다시 이어지고 회복되어지는 질 수 있는 가능성 매듭이 될 수 있다. 타키와 미츠야는 엃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만나기도 했다가 다시 헤어지고, 타키가 미츠야고 미츠야가 타키이고 다시 헤어지는 작업을 반복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두 사람의 만남은 얽히고 섥히고 그러다 다시 풀어지고 이어지는 매듭과 같다. 떨어져있지만 손에 묶여진 끈으로 머리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입으로 만든 술을마심으로써 반쪽이 하나가 되고...시간은 감독의 시선에서 애틋함과 그리움으로 파멸이면서도 회복의 도구가 된다. 감독의 시선안에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위로나 위안 더 나아가 연민같은 것이 담겨있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또는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에 대한 불안감과 애틋한 연민같은 정서가 일본 영화안에 있다. 그것이 감정과잉으로 누군가에게는 거슬리고 누군가에게는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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