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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좋더만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한국판 신시티 어른들을 위한 동화

부패하고 얼룩진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탐정 홍길동’은  ‘신시티’를 많이 차용했다.  영화 포스터만을 보면 그냥 단순한 오락영화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한국적인 다크 히어로물로 자리를 잘 잡은 영화이다.  천재적인 탐정이지만, 과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좌뇌의 해마가 충격을 입어서 겁이 없고 기억을 못하는 천재적인 탐정, 홍길동.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이 없는 그가 유일하게 찾지못했던 어머니의 원수 김병덕을 수십년만에 찾게되면서 이야기는 전개가 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았던 김병덕은 누군가에게 납치가 되고 김병덕이 키우던 손녀들을 데리고 김병덕을 찾아다니면서 차츰 홍길동은  그 뒤에 가려진 거대한 음모와 자신의 과거를 알아가게 된다.  


일단 영화가 시작이 되면서 바로 연상되는 영화는 바로 ‘신시티’다. 신시티 특유의 강렬한 회색의 영상미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차용했다고 보여지고  무엇보다 아나타키스트적인 주인공과 인물들의 대립역시 영화 ‘탐정 홍길동’의 배경이 된다. 그런 만화적인 설정과 미장센이 주는 우울한 분위기가 ‘탐정 홍길동’에 전체적인 분위기였다면 말순이라는 시크하고 강렬한 유머를 가진 캐릭터를 통해 색깔을 입혔다는 것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홍길동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던 김병덕의 입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라지만 김병덕은 다시 자기에게 똑같은 기회가 온다해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을 한다. 정의나 도덕이나 규율이나  가치나 그 모든 것들이 갖는 위태로움, 그 비정한 세상에서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최선은 자기 역시 비정해질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홍길동은 김병덕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되지만, 김병덕과는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동희와 말순이를 살리고, 그자리에서 김병덕을 살린다. 하지만, 이어지는 총격씬에서  김병덕이 스스로 홍길동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짐으로해서 스스로 모든 고통과 죄의 고통에서 구원받는 길을 열어준다. 이로써 김병덕도 홍길동도 비정한 세상이 입혔던 모든 상처에서 구원을 얻게된다. 사실은 일평생 홍길동의 어머니를 죽인 죄책감에 살았던 김병덕으로 하여금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홍길동을 위해 대신 죽음으로써 홍길동의 모든 트라우마와 고통을 해소하고 스스로도 그 죄책감의 짐을 벗고 구원하는 길을 열게된다. 비정함과 상처만 남아있는 땅에서 회복이 이뤄진것이다.

재미있는건 영화에는 아버지가 부재하다. 동희와 말순이를 키운건 할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없다. 홍길동의 분노와 고통은 어머니의 죽음때문이었다. 강렬한 악역이었던 강성일은 죽으면서 아버지가 가만히 둘것이냐고 말하며 죽는다.  아버지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 음산한 영화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할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존재는 또다른 폭력과 비정함의 원인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홍길동의 모든 재정적인 후원을 하고 있는 동업자 황회장은 여자이고, 동이와 말순이를 지키고 보호함으로 인해 홍길동은 자신의 과거의 상처에서도 차츰 벗어나게 된다. 

말순이는 홍길동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하고 삼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뿐이다. 그리고 친구가 없던 홍길동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구원자 역할을 하게 된다. 악이 관영한 음산한 시대는 아버지의 부재와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그리고  그 시대를 살려가고 그런 시대에 색깔을 입혀가는건 엄마라는 여성성이 아닐까.  다소 엉뚱하면서도 직관적인 천재성이 음산한 영상미와 어울러지며 자칫 무거울수 있었을텐데, 말순이라는 강렬한 캐릭터를 통해 적당한 긴장의 이완작용을 잘 버무렸다. 

또한, 이웃남자에서 소름끼치는 악역을 맡았던  김성균은 다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으면서 초반 산만해질 수 있던 영화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주었다.

죄와 비정함이 관영한 시대 그리고 그들을 역시 비정하고 천재적인 방식으로 제압해가는 아나키스트적인 영웅과 영상미. 

모든게 회색빛처럼 모호하고 음울한 시대에 들려주는 어른들을 위한 몽환적인 동화와 같은 영화이다.